겨울비 단상

2021.11.11 14:51:27 제943호

치과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 이야기(540)
최용현 대한심신치의학회 부회장

어제부터 비가 내린다. 그제가 입동이었으니 겨울비라 해야 하건만 느낌은 아직도 겨울비보다는 가을비 같은 정경이다. 겨울비라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스산한 바람을 느끼는 것이 어울릴듯하지만 아직도 아파트 창밖에 보이는 나무들은 단풍이 절정이다. 입동을 기준으로 하루 차이로 가을비와 겨울비가 갈렸지만, 기후온난화 탓에 아직도 늦 모기가 기성을 부려 하루에 한두 마리를 잡다 보니 겨울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속담에 ‘봄비는 일비고, 여름는 잠비고, 가을비는 떡비요, 겨울비는 술비다’라는 말이 있다. 농경시대에 봄에 비가 오면 밭일을 가야 하고, 여름 장대비에는 일을 못나가 집에서 잠이나 자고, 가을에는 먹을 것이 많으니 떡을 해 먹고, 겨울에는 술 한 잔 걸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과거 조선시대에 이처럼 떡을 해 먹고 술을 해 먹을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다. 드물게 풍년이든 해라면 모를까 대부분은 봄에는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고 가을에는 탐관오리의 과도한 세금에 견디기 어려웠다.

 

조선 초기 문인인 이희보는 ‘동우탄(冬雨凄)’에서 겨울비는 매정하다고 하였다. 쌀이 없어서 밥하는 불이 꺼져 있고, 먹을 것이 없어서 늙은 아내는 밤새 통곡하고, 아침에 도토리라도 찧어 먹으려고 했는데 그나마 절구통이 물에 잠기고 진흙탕이 되었고, 딸은 배고프다고 조르는데 사립문에는 아전이 세금 받으러 왔다는 내용이다. 「冬雨凄 冬雨凄, 炊絶夜哭山翁妻,欲 橡栗充朝飢,杵漂砧沒泥飜蹄,兒女索 柴門東,縣吏催科柴門西」 이 정도라면 충분히 겨울비를 한탄할 만하다.

 

과거 농경시대에 시대 현실은 간간이 있는 풍년을 제외하고는 ‘동우탄’처럼 어렵고도 힘들었다. 게다가 조선후기가 되면서 삼정이 문란해지면서는 가을이면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걷으러 오는 아전들의 극성이 가을 모기보다 더했다. 겨울비는 힘든 현실에 설상가상이었으니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적어도 스스로 굶는 시대는 아닌 지금 겨울비는 허유의 ‘겨울비’에서처럼 마음을 시리게 한다. 그는 「마음이 춥고, 사랑 가난할 때, 겨울비가 내린다」고 하였다. 어쩌면 역으로 어제 겨울비가 내린 것이 요즘 모두가 마음이 춥고 사랑이 가난해진 탓에 하늘이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비와 겨울비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어떤 면에서 그나마 가을비는 정감이 있다. 두보가 ‘추우탄(秋雨歎)’에서 「雨中百草秋爛死 가을비 속에서 온갖 풀들이 시들고 죽는다」고 한탄하였지만 그래도 가을에는 떨어진 과일이라도 있고 사람들이 베푸는 마음이라도 있으니 굶지는 않았다. 가을비는 지금은 정치인인지 시인인지 구분이 안 되는 도종환의 ‘가을비’에서 잘 표현된 듯하다.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했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도종환 시 역시 두보 시처럼 가을을 낭만으로 보았다. 가을비는 낙엽을 떨구며 초목을 시들게 하여도 처절함이 아닌 소멸에 대한 낭만이 있다. 반면 겨울비는 ‘동우탄’처럼 처절하거나 허유 시처럼 사랑이 가난하고 마음이 춥고 시리다.

 

하루 차이로 입동이 지나서 가을비라 하지 못하고 겨울비라 부른다. 이 역시 자연의 질서이다. 하루 차이로 예비 후보에서 후보로 바뀐다. 하루 차이로 합격자과 탈락자로 바뀐다. 자연의 질서는 시간의 순서이다. 시간의 순서는 늘 준비를 요구하고 혹독한 평가를 가한다. 봄에 씨를 뿌리지 못하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다. 비록 하루 차이지만 겨울비는 가을비와 분명 다르다. 시간의 순서에 따른 겨울비가 내린다. 이제 다시 시간의 순서에 따라 1월에는 눈으로 내리고 내년 3월이면 봄비로 내릴 것이다. 비가 내리면 번잡한 세상이 차분해진 느낌이 들어 좋다. 뉴스로 전달되어오는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 모습도 눈이 모두 덮어버리듯이 비 오는 날은 차분해진다. 그런 탓일까? 오늘처럼 스산한 비 오는 날엔 커피 향이 더 좋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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