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신문 논단] 슬기로운 치과생활

2022.03.24 13:43:00 제960호

박세호 논설위원

최근 종영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보았다. 흥미진진하고 감동 있는 스토리로 치과의사인 필자가 보기에도 멋져보였다. 한편으로 필자의 치과생활엔 저런 인간미 넘치는 에피소드들이 없는 것일까하고 떠올려 보았는데 다음 두 이야기가 생각났다.

 

에피소드 1 : A씨를 처음 안 것은 그분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작은 체구에 몸이 가벼운데다 성격도 엄청 급한 어머니는 병원문을 들어서면 필자부터 찾았다. 대기환자가 있든, 다른 환자를 보고 있든 대뜸 틀니 때문에 잇몸 여기저기가 아프니 잠깐만 봐달라고 하셨다. 성에 차지 않으면 하루에 몇 번이건 와서 여기 조금만 손봐달라고 내손을 끌었다. 볼일이 끝나면 뒤도 안돌아보고 문을 휙 열고 가곤 했다.

 

어느날 각진 하관에 날카롭게 보이는 눈에 얼굴이 길며 체구가 바짝 마른 아주머니 한분이 왔다. A씨였다. 한참 치료를 받던 그녀가 어떤 할머니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서 그분이 자신의 어머니이며 의절하고 산다고 했다. 동글한 얼굴에 키가 작은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은 외모였다. ‘의절’이라는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당황해하던 필자에게 나랑은 관계없는 분이니 잘 해드리라는 말을 덧붙여왔다.

 

그러던 A씨가 잇몸이 안좋아 치료받으러 왔다. 잇몸건강은 전신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요즘 무슨 신경 쓰는 일이 있는지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딸이 자살을 했다는 것과 그 딸과 자신이 어머니와 자신처럼 의절하고 지내왔다는 것을 얘기했다. 

 

마치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사산한 줄도 모르는 산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오열하는 것처럼 한참을 목 놓아 우는 A씨를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았다. 때로는 무심코 던진 작은 소통의 말이 큰 울림을 울리는 법인가보다. 딸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해줘야 할 어머니에게 조차 털어놓지 못하는 A씨는 필자가 던진 ‘신경 쓰는 일’이란 한마디 공감의 말이 얼마나 간절했길래 저럴까 싶었다. 웅성거리는 대기실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들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에피소드 2 : B씨는 필자가 공보의로 지내던 작은 면소재지 우체국장이었다. 애주가였던 B씨에게는 마을 농협조합장이었던 술친구 C씨가 있었다. 두주불사를 마다않던 두 분은 음주운전으로 차를 두 대나 폐차시켰다고 한다. 두 분을 알게 된 것은 치료 차 보건지소에 방문했을 때였다. 필자가 3년 동안 같은 곳에 근무했던 터라 우연히 만나게 되면 인사 나누는 정도의 사이였다.

 

떠밀리듯 3년이 지나 개원을 하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선 당신의 집을 저당 잡히고 싶지 않으시다며 담보대출을 부탁한 필자의 제안을(물론 이자겸 생활비를 다 책임지겠다고 했었다) 한 번에 딱 끊어 거절하셨다. 필자에게는 200만원의 퇴직금이 전부였다. 대출을 알아보러 마을 농협에 갔더니 2,000만원까지 대출이 되지만 조합원 두 사람의 연대보증이 필요했다. 난감해 하던 그때 두 분이 선뜻 연대보증 서주겠다고, 개원 잘해서 얼른 갚으라고 격려까지 해주셨다. 

 

개업을 하고 대출금을 갚는 사이, 낮술을 거하게 하신 두 분의 세 번째 차가 논바닥을 굴렀고 C씨는 중태에 빠져 몇 번의 고비를 겨우 넘기고 살아났다. 그리고 B씨는 목욕탕에 가서 쓰러졌는데 어떤 치과의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알고 보니 필자의 절친 선배였고, 심지어 심각한 심장질환으로 입원한 대학병원 흉부외과에서 목숨을 구해준건 필자의 고등학교 동기였다고 한다. 그 일을 두고 B씨는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그 작은 시골마을 떠난 지 20여년. 두 분은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아마도 네 번째 차는 차마 포기하신듯했다) 필자의 치과로 치료를 받으러 오셨다. 몇 년 전 돌아가신 B씨가 살아있다면 올해 80세다. 평생을 피워온 담배가 당신을 거둬갔다. 얼마 전 오신 C씨가 외롭다고 했다. B씨가 그립다며 꿀단지 하나를 주고 가셨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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