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적이 없다”

2022.05.19 13:51:10 제968호

치과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 이야기(565)

실장님이 교정과로 접수된 환자 불만을 응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오전에 진료받은 환자 어머니가 전화해 추가 비용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데 갑자기 덤터기를 썼다는 내용이었다. 개원의 시절에 종종 겪던 일이었지만 수가표에 따라 수납하는 대학병원에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개원의 때는 환자에게 비용을 설명하고 모두 서명을 받았지만, 대학병원에 근무하고부터는 설명하면서 차트에 적어놓고 따로 서명을 받지 않았다. 내원 당시 환자에게 설명했었다는 차트를 보내주니 “차트는 병원에서 기록한 것이니 믿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장시간 대화 끝에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을 여러 번 사과하고 마무리했다는 실장님은 지친 모습으로, 앞으로는 서명을 받는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또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2008년 리먼사태가 터지고 이와 유사한 환자 불만이 증가했던 경험이 있다. 사회 전반의 경제 사정이 매우 어려워지면서 비용으로 인한 불만이 증가하면서 비용설명서를 만들고 서명을 받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차팅은 네가 한 것’이란 말은 본인도 알고는 있지만, 객관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고수해야 할 만큼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내포한다. 품위를 포기할 만큼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이란 말이다. 가격이란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상호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교환 가치다. 가격에 대한 부정은 소비자나 판매자의 환경조건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가격에는 다양한 용어가 있다. 서비스업에는 봉사료(charge), 교통시설이용료는 차비(fare), 물건값은 가격(price), 병원비와 변호사비 등은 비용(fee), 학교나 학원은 수업료(tuition)이다. 한글에서는 통상 비용(price)을 의미하는 ‘비(費)’와 ‘요금(salary)’을 의미하는 ‘료(料)’로 나눈다. 치료비는 費이며 영어는 fee를 쓴다. fee의 어원은 fief에서 유래했으며 봉건시대 토지소유권을 의미한다. 봉건시대 영주가 군인들에게 토지 사용권을 주고 군사력을 이용하면서 생긴 용어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자로부터 기술을 제공받으며 지불하는 비용이다. 기술이란 결과가 눈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나쁠 때만 불만을 표할 수 있다.

 

결과가 좋은데도 불만을 표하는 유일한 방법은 계약 자체를 부정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 “들은 적 없다”는 말이 늘어난다. 물론 환자 입장에서 실제로 들은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처럼 차트에 기록돼 있는 경우에는 3가지 가능성이 있다. 설명할 당시 집중하지 않았거나, 시간이 오래돼 기억이 사라졌거나, 환자가 알면서 우기는 경우다. 물론 차트에 기록이 없다면 환자 주장처럼 듣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경기나 나빠지면 이런 유사한 일은 자주 발생할 것이다. 방지하는 방법은 처음 비용을 설명하면서 서명을 받는 것이 차후에 발생할 분쟁을 방지하는 데 가장 좋다. 우리 병원은 이번 일을 계기로 환자에게 비용을 설명하고 동의하면 서명을 받을 수 있도록 수술동의서와 유사한 양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서민 생활이 어려워지면 그들을 상대하는 일선 치과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를 들면 치과 외래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이 아픈 것이 낫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신경치료도 잘 됐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아프다. 보철 크라운이 높다고 해 계속 갈아서 대합치와 닿지 않는데도 높다고 느낀다. 이런 환자를 외래에서 가끔 만난다. 고의가 아니더라도 지불해야 할 치료비가 없는 경우에 심리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혹은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이유 없이 아픈 신체화장애 혹은 전환장애도 증가한다. 물가와 금리가 급격히 오르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며 지출에 대한 불안이 더욱 증폭된다. 증폭된 불안은 기억을 왜곡시킨다. 환자 어머니 기억도 왜곡됐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는 존재다. 어떤 뜻밖의 사건이 발생되면 상황에 끌려가기보다는 한걸음 떨어져 관조하면서 해결점을 차분히 모색하는 것이 도움될 때가 많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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