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신문 논단] ‘얼마나 가겠어’

2022.06.02 16:03:49 제970호

김용호 논설위원

2008년 봄, ‘싸구려 커피’라는 곡으로 대중가요계에 나타난 장기하가 그의 노래들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와 분위기는, 딱 30년 전인 1978년 ‘아니 벌써’라는 곡으로 등장했던 산울림의 등장에 버금갈 정도로 새로웠다. 장기하의 곡들은 소위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우리 사회의 어둡고 ‘눅눅한’ 그늘들을 가차 없이 벗겨 설명하고, 깊숙이 해부하여 묘사했다.

 

가장 주목받은 곡인 ‘싸구려커피’의 가사에서뿐만 아니라 이듬해 나온 앨범 ‘별일 없이 산다’에 담긴 한 곡 한 곡 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느끼는 안일함과 무력감을 그만의 독특한 작사, 작곡, 연주 기법으로 그득그득 담아내었었다.

 

이후 많은 상을 받고 십 년이 넘게 적잖은 인기를 누리다가 함께하던 밴드를 해체하고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그가 2년여를 홀로 지내며 만들었다는 앨범이 올해 초에 나와 관심을 가지고 들어봤다. 여전히 시대의 그늘이 주는 권태와 짜증스러움들을 그만의 감성으로 솔직히 읽어주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분위기이다. 그가 만든 곡들의 제목과 가사 여기저기선 명문대 사회과학도로서의 직관과 용기를 엿볼 수 있는데, 이번 앨범에도 예전 ‘싸구려 커피’에서처럼 필자의 눈길을 끄는 곡이 있는바, 노래 제목인즉 ‘얼마나 가겠어’였다. 뭐 제목과 다를 것 없이 ‘…그래봤자 얼마나 가겠어…’ 후렴으로 반복하며, 실망을 안겨준 그 무엇(개인일 수도 집단일 수도 있는)에게 불신과 체념을 덤덤히 투덜댄다.

 

이 곡이 실린 앨범 ‘공중부양’의 모든 곡들에서는 특이하게도 대중가요의 생명력이고 흥겨움의 요소인 베이스음이 아예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곡마다 디딜 땅이 없는 공허한 느낌들을 담아내느라, 베이스도 빼고 앨범명도 ‘공중부양’이라고 이름하였노라고 얘기했다.

 

환경문제와 더불어 생겨나 요즘 여기저기서 유행하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단어가 자주 눈에 뜨이고 귀에 들리는 이 시절에, 느닷없이 찬물 끼얹듯 ‘얼마나 가겠냐’라는 외침은 비록 대중문화 속의 메시지라도 주목할 만하다. 어떤 문제를 두고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비가역적 임계점에 도달해서야 저 단어들을 논한다는 건 참으로 늘 안타까운데, 심각한 임계점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었음에도 모른 척하며 내 집 뒷마당은 안되고(not in my backyard, NYMBY) 내 임기 중엔 다루지 말자(not in my term, NIMT)는 식의 이기적이고 무사안일의 태도로 시간낭비하는, 공동체 내 관련자들의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 gross negligence, dolus eventualis) 범주의 중대과실에 대한 경고로 이해된다.

 

진료실의 종이티슈는 진료중 수도 없이 뽑아 쓰게 된다. 한 장 잡아당겨 쓰면 또 한 장의 티슈가 다음을 위해 딸려 나오도록 접혀 차곡차곡 쌓여있다. 하지만 한 묶음이 다 소모되고 시작되는 다음 묶음의 첫 장은 손가락을 집어넣어 잡아당겨야 나온다. 바쁠 땐 그 작은 ‘지속가능하지 않음’ 조차 업무저항이고 불편함이다. 해결책은 뻔하고 어렵지도 않다. 새 팩을 넣을 때 아래 잔량의 맨 윗 티슈와 새 팩의 맨 아래 티슈를 겹쳐 끼워주면 된다. 그런 사소하고 작은 부분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해결방안에 동의하고, 빈틈을 메워가는 자세와 실천이 적어도 4차산업혁명과 디지털을 이야기하고 ESG를 표방하는 시대에 우리 모두 함께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를 정의하는 건 우리의 생각이나 의견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하는 행동’이라 반복되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금융기관이나 관공서에 전화로 업무를 보려고 할 때, 수도 없이 경험하는 ARS는 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연령층과 특수계층에게는 너무 높고 두터운 벽이고 심하게 표현하면 폭력이다. 주먹으로 때린 적 없고 흉기로 상해를 입히지 않았어도, 그 서비스이용이 불가한 사람에게는 신체적 상해보다 더한 정신적 소외이고 절망이며, 시간적,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안겨준다. ‘극히 일부가 좀 불편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효율적으로…’ 라는 논리와 명분은 7~80년대 이전의 사고방식이다. 극히 일부인지, 일부인지, 상당한 부분인지 아니면 대부분이 불편한지는 짧은 임기 동안 backyard를 점유하다 볼일 보고 떠날 이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minority 그룹을 배제하는 현상은 공동체 내의 연대감과 결집력이 줄어들고 있을 때 나타나는 해체의 전조현상이다. 예컨대 고령층이 ARS서비스가 불편함을 느끼면, 해당 ARS서비스가 불편함이 전혀 없는 젊은 층도 그것을 함께 공감하고 문제해결에 함께해야 제대로 건강한 공동체이고 ‘지속가능한’ 유기체인 것이다. 필자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이상적 기준을 논한다는 주장을 펼칠 독자도 계시겠지만, 아마도 그런 반론은 앞서 언급한 미필적 고의 주체로 몰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본다. 여러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또는 적어도 서로의 문제들을 모른 척하고 있기 시작한 지가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 치과계도 분명한 공동체다. 혼자서 ARS에 불편함 없다고, 내 앞사람이 마지막 티슈를 뽑는 불운이 내게는 없을 거라고, 내 병원진료실에 내가 ‘병원하는 동안’은 그런 거 저런 거 다 괜찮으리라 생각한다면 머잖아 모든 것이 불편한 궁경에 접어들 상황이다. 우리가 비슷한 문제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당연히 뜻과 힘을 모아 우리의 영역을 지켜, 환자를 돌보는 의료인으로서의 업(業)을 다하고 전문직의 직(職)을 지키는 일에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대부분 ‘얼마나 가겠어’로 평가되는 이 시대에 ‘얼마든지 가겠어’로 함께 나아가는 길이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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