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갑자기 찾아온 동기의 죽음. 인생이란 왔다가 가는 것이고, ‘오는 데엔 순서가 있더라도 가는 데엔 순서가 없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움에 당황하였다. 또한 내가 존경한 어떤 분의 이중성과 타락을 접하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대체 우리가 추구하고 사는 인생의 행복은 무엇일까?
몇 달 전, 결혼하고 20 여년 만에 남편과 같이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로마인이야기에 나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이 있었다는 카프리섬도 가보고, 아름다운 3대 미항인 나폴리항도 보았다. 푸르고 맑은 지중해의 아름다움과 따스한 햇살은 지금도 기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폼페이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이렇게 한 순간에 화산폭발로 사라져버릴 수 있구나 하는 것과, 당시 로마사회의 성적 타락의 일면을 보게 되어서 씁쓸하였다. 인간이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일까?
베네치아의 수상도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라이브 연주를 들으면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하는 즐거움도 체험했다. 여행은 즐거운 것이었고, 행복하다고 느꼈다. 또 행복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일할 곳이 있고, 자신의 생각을 나누며 같은 공동체임을 느끼는 것. 동료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과 그들과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행복이 아닐까? 필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일까? 행복은 멀리 외국을 여행하는 체험에서도 있는 것이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래, 이번에는 행복이 무엇인지 좀 유식하게 정리된 지식을 한번 찾아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사는 목적이 ‘행복’이라고 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행복이나 명예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서 관조, 중용’이라고 했다. 앞의 것은 타율성을 띤 것이기에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에는 공식도 있다. 행복=P+5E+3H 란다. P(Personal)는 인생관과 적응력, E(Existence)는 건강, 돈 등 생존의 기본요소, H(Higher order)는 자존심, 야망과 같은 상위욕구라고 한다. 1:5:3의 비율이 재미있다. 생존의 기본요소가 50%이상은 채워져야 한다는 말일려나..... 그리고 30%정도의 상위욕구가 높아질 때, 행복해진다는.....
행복은 욕구의 만족이라고 한다. 부족과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한 상태를 말한다. 행복한 상태가 보장되게 하기 위하여 국가의 헌법규정에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나라도 있단다. 그게 바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만이라고 한다.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주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이러니로 보인다. 행복은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닌데, 마치 국가가 국민의 행복의 절대적인 수준을 법으로 보장해주려고 한다는 국가주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근대철학자 쇼펜하우어도 행복이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주관적인 것이며, 행복은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것에서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출세하고 사회에서 성공하여 부를 이루었을 때 행복하다고 하고, 아침 일찍 청소차를 따라다니며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의 인생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력은 세계 12위이지만 행복수준은 68위라고 한다(영국 신경제재단자료). 왜일까? 상대적 박탈감과 행복을 물질로 환산하려는 경향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의 가치관은 물질주의에 찌들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욕심을 내게 되고, 탐욕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탐욕이 심해지면, 채워도 채워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부와 권력을 가지고도 성적 범죄에 깊이 연루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면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 평범하지만 매일의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 필자는 오늘도 주어진 일에 충실하려고 한다. 함께 하는 직원들을 사랑하고, 우리 병원에 오시는 환자들을 친절로서 섬기려고 한다. 다가오는 가을엔 우리 모든 치과가족들이 평범한 일상 속, 깊은 내면의 행복을 느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