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일화다. 치과의사 Dr.Gunning은 턱 손상 시에 적절한 고정상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극적으로 발휘하여 국가적 주목을 받았다. 1865년 4월 Abraham Lincoln 대통령 시절, 내무장관이었던 William H. Seward가 마차에서 떨어져 양쪽 소구치 부위 하악골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최초 시술은 내과의사(physician)가 하악골 치아를 철사로 고정하고 머리에 붕대를 감는 정복술을 시행했다. 이 방법은 실패로 끝났으며 우측은 구강내로 복잡 골절화되며 악화되었다.
1865년 4월 14일(부상 9일째) Lincoln 대통령이 암살당한 바로 그날, 장관은 취침도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우측 광대뼈로부터 좌측 기도에 걸친 심각한 안면열상이었다. 두 번째 부상으로 우측 하악골체가 외부로 완전 개통되어 덜렁거렸다. 그때 뉴욕 시 해군연구소장 겸 외과의사였던 Dr.Bache는 치과의사 Dr.Gunning이 경질고무상(vulcanite splint) 고정장치로 성공한 치험 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Gunning에게 급히 워싱턴으로 오도록 요청했다.
4월 16일 Dr.Gunning은 환자 검사 후 10개의 하악치아, 우측지치, 좌측지치 치근이 잔존해 있음을 알아냈다. 개교 교합이 있으며 골절부위는 심한 분리 상태였다. 우측 후방 골절편은 상당량 상승되어 있었다. 양쪽 골절부위에서 고름이 다량 분출되고, 잇몸은 창백하고 흐느적거렸으며 전신건강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환자와 주치 외과의사는 고정 장치 제작과 장착을 반대했다. 돌발 상황에 Gunning은 시술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외과 군의관 Barnes의 간청으로 다시 워싱턴에 돌아온다. 5월 2일 세 개 고정 장치 중 한 개가 장착됐다. 이 장치는 자연치아와 고정됐다. 4개월간 고정기간 후에 제거하자 양 골절편이 단단히 융합되었고 턱 기능도 만족스러웠다. 이 시술의 성공은 Dr.Gunning 뿐 아니라 전체 치과의사 직업군의 명성을 드높였다. 중요한 점은 수작업으로 제작한 견고한 고무상 고정술이 하악골 정복과 안정에 특효라는 사실이 밝혀진 점이었다.
이미 150년 전 기존의 내과·외과의사의 방법으로는 완치가 불가했던 케이스에 과감하게 그 당시로서는 용납되지 않던 치과의사를 불러들인 미국인들의 처사는 현재의 한국과는 격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치과의사의 시술이 아니었더라면 골수염, 폐렴으로 악화돼 생명부지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생존했더라도 저작불가능으로 삶의 질이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양측성 골절은 근육이 엇박자로 골편을 당기므로 정복술이 힘든 케이스다.
더구나 마취기술이 빈약했던 때 통증조절이 신기할 따름이다. 남북전쟁 당시 수많은 악안면 전상환자들을 고유한 재료와 특유의 실력으로 시술을 축적했던 경험이 한 국가의 VIP를 살려냈던 것이다. 이기적인 인종, 직역, 직종을 떠나 인간의 생명에 기여할 수 있게 누구든지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을 픽업해내는 미국의 포용·개방·자유정신이 강대국의 근본이고 본받을 점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현재 한국의 의사협회는 포용력이 전혀 없다. 오로지 대법원 판결 승패에 급급하여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대한치과의사협회를 비난하고 있다. 비록 법정비화 되었지만 진료영역이란 굳이 따질 것이 없다. 150년 전 미국과 같이 그 환자를 위해 최선·최고의 의술을 행할 수 있다면, 의사든 치과의사든 바로 그 의사가 하면 된다.
의협이 구강악안면외과 의사, 그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재판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재판결과에 상관없이 정체성을 유지하며 정진하면 그뿐이다. 비보험·고가수술에도 너무 치중하지 말고 사회적·국가적인 기여와 공헌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구강악안면외과가 살아남고 발전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