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환자의 진료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무가 ‘의사는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도 환자를 무조건 진료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생각도 해야 한다. 진료거부에 대한 처벌이 있다 보니 이를 무기로 의사를 압박하거나 의사의 윤리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는 진료를 거부하지 않는다. 더구나 경쟁이 심해지는 현재 경제상황에 비춰 본다면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보려고 안달’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료인이 진료를 하기 싫은 경우는 그야말로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틀니를 시작하면서 “못 씹어 먹으면 소송할테니 알아서 잘 하라”는 환자, 욕설이나 거친 행동을 하면서 의료진을 애먹이는 환자, 치과의 지시는 무시하고 내원일도 안 지키면서 낫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환자, 직원들에게 성추행적 행위를 하는 환자 등 의료진의 혈압을 올리는 환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다. 진료를 거부하지 말라는 것이 어떤 경우라도 이런 비상식적인 환자도 굽신거리면서 치료를 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독일에서 의사면허와 전문의 자격을 딴 가천대 이성낙 명예총장이 1970년대 말 독일에서 경험한 일을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주말 당직근무에서 술기운이 도는 환자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봐 노랭이 의사! 진료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이 총장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기본 검사를 한 뒤 “심전도 검사, 방사선 검사 및 혈액 검사 결과, 환자가 거동하는 데에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면의 타박상도 지혈이 된 상태라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점을 차분하게 설명한 후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고 한다. “본인은 이 순간부터 환자의 진료를 거부합니다”라고.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 총장은 인턴교육에서 “여러분에겐 환자 진료를 거부할 권리가 분명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무척 혼란스러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의사가 환자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환자 보호 개념’에 근거한다는 설명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환자가 의사의 치료 방침을 부당하게 거부하거나, 의사의 심리적 부담을 주는 부적절한 언어나 행동을 하는 경우, 환자와 갈등상태가 되면서 진료를 하게 되면 그릇된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다시 말해 의사의 환자 진료 거부권은 결코 의사의 권리 보호 차원이 아니라 환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낙태금지가 위헌으로 판결나면서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시술거부권을 달라는 청원을 냈다. 보수적인 의료의 개념은 환자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있고, 의사들은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건강이 개선된 결과를 생각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의 진료를 하게 된다. 그런데 건강서비스에 해당되는 의료가 생기면서 이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문신이나 피어싱은 의료행위의 범주에 속하지만, 환자를 건강하게 해 주는 의료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낙태시술도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위한 의료행위는 아니므로 시술자의 양심과 윤리관에 반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대다수 의사가 낙태시술을 거부하면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여성의 권리도 제한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현명한 방향으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이뤄져야겠지만, 이번 기회에 진료거부권이라는 어색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극소수 환자의 진료방해가 되는 상황에 대한 논의도 같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본인의 진료를 방해하는 환자도 진료를 받을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지, 더구나 그 환자로 인해서 다른 환자의 진료도 방해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의료진에게 책임만 묻지 말고 사회적 협의를 통해 어느 정도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논단은 논설위원의 개인적인 견해로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