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

2021.06.10 15:14:28 제923호

치과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 이야기(520)
최용현 대한심신치의학회 부회장

집에 오는 길에 길게 늘어선 자동차 옆으로 한 손으로 바이크를 운전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다른 한 손은 머리에 올라가 있었다. 호기심에 자세히 보니 모자가 바람에 날리지 못하게 잡고 있었다. 헬멧도 아닌 모자를 쓰고 그 모자가 날릴까 봐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 바이크를 운전하는 모습에 철없는 청소년들인가 하고 다시 보니 3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구강외과 수련시절에 응급실에서 바이크 사고를 많이 본 적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부인과 어린아이들도 있을 텐데’하는 걱정이 앞섰다. 옛날 어른들은 바이크를 ‘과부제조기’라 칭했다. 개도국 시절 처음 바이크가 수입되고 비싼 헬멧을 못 썼기 때문에 사고가 나면 큰 사고로 이어졌다. 그 후로 나온 말이 ‘사고 나면 안타깝지만 즉사하여 하루 이틀 애도하고 끝나는 것이 낫다’였다.

 

복지나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에 큰 사고는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족 모두가 생활 자체가 어려워지거나 하층민으로 전락하기 쉬웠기 때문에 생긴 슬픈 말이었다. 자동차보험과 의료보험, 복지 등의 개념이 증진된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추억 속 말들이지만 헬멧도 없이 위험하게 한 손으로 운전하며 모자를 잃어버릴까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은 사소한 일에 매달려 큰 것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처럼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시간이 지나며 바이크 운전에 자신이 생겼고 운이 좋아서 치명적인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두려움이 있었겠지만 한두 번 해도 사고가 없다 보니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고가 그렇듯이 불현듯 발생하고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또 사람의 일이고 세상사다. 게다가 서둘러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위험은 배로 증가한다. 치과의사들도 늘 마주 치는 상황이 있다. 대기실에 환자가 오래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으면 신경이 쓰인다. 더욱이 진료 중인 케이스가 휘어진 치근처럼 빨리 끝날 상황이 아니라면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진료한 지 30년이 넘은 이제서야 그 같은 상황에 서두르지 않는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해졌지만, 예전에는 발치 중에 서두르다가 치근이 파절되는 일들을 경험하곤 하였다. 요즘은 그런 상황이면 필자가 대기실로 나가서 직접 양해를 구한다. 물론 직원들이 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필자가 직접 말하는 것이 좀 더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한번은 매일 반복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빠르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 삶의 속도를 관찰해 보았다. 얼마나 빨리 운전을 하며 얼마나 빨리 식사를 하는지, 말은 얼마나 빨리하며 걸음은 어느 정도 속도로 걷는지를 관찰해 보았다. 그 후 삶의 속도를 30% 감소시켜보았다. 운전 속도를 30% 줄이니 먼저 갈 이유가 없어졌고 다른 차에게 양보운전이 가능해졌다. 말하는 속도를 30% 늦추니 상대방 말을 들을 여유가 생겼다. 모든 것이 빠른 것을 요구하는 세상에 익숙하다 보니 스스로 삶도 빨라졌다. 온도가 천천히 오르는 우물 속 개구리처럼 인식 못하고 당연한 듯 살았음을 삶의 속도를 늦추며 알았다.

 

요즘 필자에게는 ‘꼭’해야 한다는 것이 없다. 하는 데까지만 한다. 일이나 행동이 스트레스로 다가오면 멈추고 시간을 조절한다. 삶 속에서 ‘빨리’라는 단어를 지우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여유라는 이득을 얻었고 반대급부로 경제적인 손해는 감수하였다. ‘빨리’는 시간을 늘리면 해결되거나 ‘천천히’로 바뀔 수 있다. 삶에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굳이 내 것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들에 핀 예쁜 꽃이 굳이 내 방 화병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굳이 내 것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들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지불했었다. 들판의 꽃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 집으로 가져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삶의 속도를 늦추면 더 많은 꽃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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