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산지에서 시작된 치과의사의 소명
공윤수 원장(59·미보치과)에게 봉사는 선택이 아닌 운명이었다.
2000년 12월, 그는 필리핀으로 떠났다. 기독교 선교사로서 산지족 마을을 찾아다니며 구호품을 나누고 문맹화 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그를 가장 필요로 한 것은 치과진료였다. “제대로 된 의료기관이 없었어요. 치아를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치료, 발치만 해야 했습니다.”
9년간의 선교 생활 동안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아쉬움이 남았다. 그 아쉬움은 훗날 해외 6개소에 치과진료소를 설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6개국 치과진료소, 의료 사각지대를 밝히다
귀국하여 2010년 서울 성북구에 미보치과를 개원한 공윤수 원장은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의료봉사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필리핀 깔라오칸시 한센인 거주지역을 시작으로 가나 테마 시, 캄보디아 깜뽕스프와 프놈펜, 다시 필리핀 산안토니오와 블라칸까지. 그가 설립에 기여한 간이 치과진료소는 총 6곳에 이른다. 2017년 이후에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한국보건의료정보정책연구원 등 국내 주요 기관과 협력해 치과뿐 아니라 내과, 가정의학, 한방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의료봉사를 주도했고, 2022년에는 필리핀 판디 지역에 모자보건센터와 도서관 설립에 도 기여했다. 이 활동은 2024년까지 이어지며 올해도 계획되어 있다.

국내 의료 사각지대를 향한 따뜻한 손길
“치과치료는 비용이 많이 들고 시기를 놓치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없어졌으면 합니다.”
해외만큼이나 공윤수 원장의 국내 봉사 이력도 두텁다. 그는 미보치과를 개원하면서부터 기초생활 수급자, 편모·부자 가정, 의료 사각지대의 무의탁 노인과 소년소녀 가장에게 무료 치과진료를 제공해왔다. 성북구장애인복지관과 협력해 중증장애인을 직접 방문하고, 외국인 노동자와 지역 구민을 위한 무료 구강검진도 꾸준히 실시했다.
또한 저소득층을 위한 기금마련 음악회를 개최해 후원 티켓 판매 수익금 1,000여만 원을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하고, 성적이 우수하면서도 봉사에 적극적인 저소득층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재능 기부와 나눔의 선순환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치과는 봉사를 위한 단순한 무료 진료에 그치지 않는다. 최신 장비와 시설을 갖추는 데도 아낌이 없다. “봉사라고 해서 치료의 질이 낮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은둔형 쌍둥이 자매, 다시 세상으로
수많은 환자 가운데 공윤수 원장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이들은 음악을 하던 쌍둥이 자매다. 개인 사정으로 사회와 단절된 채 오랜 시간 은둔 생활을 하던 그들은 극심한 저체중과 영양실조로 치아 대부분이 빠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마취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체력이었지만, 공 원 장은 여러 기관과 협력해 틀니부터 임플란트까지 장기간에 걸친 치료를 진행했다. “무조건 무료로 해드린 게 아닙니다. 나중에 건강을 회복하면 재능으로 봉사하며 갚으라고 했어요.” 치아뿐 아니라 삶의 의지를 되찾도록 격려한 그의 진심은 두 자매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공 원장에게 치료란 단순히 치아를 고치는 일이 아니다. “환자의 마음을 만져 주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봉사를 지속하는 힘, 철저한 자기 관리
17년 넘게 국내외 봉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공 원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혈압, 당뇨, 고지혈증 약을 한 움큼 먹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농사지은 유기농 식재료로 식단을 관리하고, 헬스와 탁구 등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 봉사를 모두 소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다.
치아를 살리고,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국경을 넘어 의료 사각지대를 밝혀온 공윤수 원장. 그의 여정은 ‘치과의사가 된 것이 감사하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공윤수 원장의 봉사는 끝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