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이를 뽑지 않기로 했다

2026.09.05 08:30:04 제1174호

[여르미 도서관-7] 책은 어떻게 치과의사의 삶을 바꾸는가
류지아 원장(작가 여르미)

몇 달 전 나를 슬프게 한 외국인 환자가 있었다. 시작은 평범했다. 구릿빛 피부, 투명한 눈빛을 가진 스무 살 외국인 청년이 체어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외모를 가진 사람은 대체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짧은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인사를 건넨 뒤 차트를 바라봤다. 차트에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심’이라는 메모와 함께 짧은 한 줄이 적혀 있다. “이를 빼주세요.”

 

옆에 띄워놓은 엑스레이를 다시 바라봤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닌데.’ 충치가 깊긴 했지만 신경치료하면 너무 멀쩡히 쓸 것 같은 #36 치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그 청년을 바라봤다. 그는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 너무 아프다는 뜻이었다. 이를 빼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통역해 주는 분이 들어왔다. 그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는 배를 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한 번 고기잡이배를 타면 2주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청년은 막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내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러니 안 아프게만 해달라. (환자들이 이렇게 말할 때마다 늘 생각한다. ‘안 아프게만 해달라’는 말이 치과의사에겐 가장 어려운 부탁 아닐까 하고)

 

그가 말하는 ‘안 아프게만’이라는 단어에서, 무심한 귀찮음이 느껴졌다. 환자는 너무 아파서 간절하고, 보호자는 더 이상 복잡한 치료를 책임지고 싶지 않은 상황. 잠시 짧은 고민에 빠졌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자와 보호자가 원하는 진료를 해줘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소신 진료를 권해야 하는가.

 

결국 나는 신경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나이가 너무 어렸다. 스무 살에, 어금니 하나를 발치하게 되는 가난한 청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분명 그는 발치한 뒤 아무 치료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주변 치아는 발치한 공간으로 기울어질 테고, 결국 몇 년 뒤에는 더 큰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밥을 제대로 씹어 먹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아. 분명 밥벌이를 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텐데 이가 없어서 밥을 제대로 못 먹을지도 모르는 이 아이러니라니.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설득했다. 어쩌면 치료에 걸린 시간보다 설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청년은 신경치료를 받기로 했다. 치료하면서 다시 봐도, 치아는 너무 멀쩡했다. 치료를 마친 뒤 주의 사항을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약을 한 움큼 처방해서 보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바랐다. ‘내일 배를 잘 타고 가기를’ ‘다시는 이가 아프지 않기를’

 

그런 뒤 사실 나는 그 환자를 잊고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다시는 안 올 가능성이 높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확히 3주 뒤, 그 청년이 다시 치과에 찾아왔다. 체어에 앉은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차트를 확인했다. “신경치료 마무리하러 왔어요”

 

청년은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이 그는 무사히 첫 배를 탔고, 첫 월급을 받았다. 그리고 첫 월급으로 신경치료를 마무리하고 크라운까지 하러 다시 치과에 온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마음이 찡했다.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내 진심이 환자에게 조금은 전달된 것 같아 기뻤다고 해야 할까. 첫 배를 타느라 분명 많이 피곤했을 텐데,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온 것도, 귀한 첫 월급을 치료에 쓰겠다고 결심한 그 마음도 고마웠다. 그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치료하길 참 잘했다고. 환자가 당장 원하는 것 대신 그의 몇 년 뒤를 고민했던 건 잘한 선택이었다고. 그리고 치과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 깊이 바랐다.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이곳에서 더 이상 아픈 일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기를. 평안하기를.

이가영 기자 young@sd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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