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치의학 서적의 초기 번역본에서 ‘crown and bridge’를 ‘왕관과 다리’로 직역한 것을 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번역의 마법’이라 불리는 극명한 사례를 통해 임상에서 환자의 언어를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는 우리 치과의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을 통해 연합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권고했다. 당시 일본의 스즈키 칸타로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정부 입장을 ‘모쿠사츠(默殺, 묵살, mokusatsu)’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스즈키 총리의 본의는 ‘노코멘트(No comment)’, 즉 군부의 반발을 고려해 시간을 벌며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려는 ‘전략적 침묵’에 가까웠다.
하지만 총리의 기자회견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시 일본의 대외선전매체 역할을하던 도메이통신은 영문기사에서 ‘모쿠사츠’를 ‘언급(논평)을 삼간다(No comment)’ 대신 ‘무시한다(ignore)’쪽으로 보도하고, 연합국 측에도 ‘Ignore(무시)’ 혹은 ‘Reject with contempt(경멸 섞인 거절)’로 번역되어 보고되었다.
이 치명적인 오역은 트루먼 대통령을 격분시켰고, 결국 답변이 나온 지 불과 열흘 만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1945년 8월6일, 1945년 8월 9일) 일본인 25만명이 목숨을 잃는 등의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으니 실로 단 한 단어의 번역 오류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의 구실이 된 것이다.
반면, 번역이 원문을 초월해 대중의 심장에 박히는 ‘마법’을 부린 사례도 있다. 1942년 영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 “Here’s looking at you, kid”가 대표적인 것으로 직역하자면 “여기에 당신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혹은 “당신을 위해 축배를” 정도의 건조한 문장이다. 하지만 이 대사는 한국에서 “그대 눈동자에 건배”라는 불후의 ‘명번역’으로 재탄생했다. 험난한 전시 상황 속에서 헤어져야만 하는 연인(릭 역할의 험프리 보가드, 엘사 역할의 잉그리드 버그만)의 애틋함과 상대방의 슬픈 눈망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주인공의 로맨티시즘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원문에는 없는 ‘눈동자’라는 단어를 끌어와 감정의 밀도를 극대화한 이 번역은, 한국인들의 정서적 DNA에 ‘낭만’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치의학의 역사에서도 번역은 늘 도전이었다. 이는 서구의 학문 체계를 우리식으로 체화하는 과정에서 겪은 성장통이기도 하다. 치과의사들이 매일 마주하는 단어들도 사실은 고도의 번역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Enamel’을 법랑질(琺瑯質)로, ‘Dentin’을 상아질(象牙質)로 번역한 선구자들의 고민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명확한 개념을 공유하며 진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치과 임상가로서 본연의 역할을 되돌아볼 때,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즉, 그들은 우리에게 교과서적인 용어로 증상을 얘기하지 않는다.
“이 치아가 너무 아파서 잠을 못 잤어요. 너무 욱신거려요”
“잇몸이 근질근질하고 붕 떠 있는 기분이에요.”
환자가 쏟아내는 이 파편화된 언어들을 치과의사는 정확하게 ‘번역’해내야 한다. ‘욱신거림’과 ‘야간통’ 속에서 치수염의 신호를 읽어내고, ‘근질거림’ 속에서 치주질환의 심화 단계를 포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임상가의 번역술이다.
잘못된 번역이 ‘모쿠사츠’의 비극을 낳듯, 환자의 호소를 오역(誤譯)하면 오진(誤診)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환자의 숨은 고통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확실한 감별 진단을 통해 신속하게 치료해 줄 수 있다면 소음 가득한 진료실이 ‘그대 눈동자에 건배’와 같은 낭만적인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치과의사들이 아픈 환자들의 언어를 더욱 잘 번역해 정확한 진단과 따뜻한 공감 능력을 갖춘 슬기로운 임상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