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료 현장은 첨단 장비와 효율적인 시스템이 지배하는 각축장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진료는 정밀해졌지만, 역설적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 환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데이터’나 ‘기술’로 치환될 수 없는 ‘인간적 유대’에 대한 갈증일 것이다.
필자가 21년 동안 개원의로 살아가며 나름의 최선으로 지켜온 원칙 중 하나는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드리는 것이다. 이 소박한 ‘호명의 미학’에 담긴 인문학적 배경과 뇌과학·심리학적 근거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료의 본질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치과 진료실에서 환자는 흔히 ‘몇 번 체어 환자분’, 혹은 ‘임플란트 상담 환자’라는 익명의 존재로 머물기 쉽다. 그러나 의료진이 환자의 이름을 정성껏 불러주는 순간, 그는 수많은 내원객 중 한 명이 아닌 ‘단 하나의 고귀한 존재’로 격상된다. 이름은 그 사람의 삶과 정체성이 응축된 고유한 기호로서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나는 당신을 질병이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 마주하고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선언과도 같다.
의료 현장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가치는 환자와 치과의사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고, 진실한 치유자로서 신뢰를 구축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 서울주보의 한 구절은 깊은 통찰을 준다.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말이나 설득이 아니라, 이름을 기억해 주고 기다려 주는 마음임을 깨닫는다.”
치과 치료는 본질적으로 긴장과 두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에 치과의사가 환자에게 치료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할 때, 환자는 오히려 심리적 방어 기제를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진료 때 나누었던 사소한 일상을 기억하며 이름을 불러주고, 환자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 주는 태도는 그 어떤 유창한 설명보다 깊은 신뢰를 만들어낸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관심’의 증거이며, 기다려 준다는 것은 ‘존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명’의 가치는 인문학적 수사에만 그치지 않는다. 심리학과 뇌과학에서는 이를 ‘자기 참조 효과(self-reference effect)’라고 부르는데 사람은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된 정보, 특히 자신의 이름이 들릴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되며 주의집중력과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한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론의 대가 데일 카네기 역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은 그 어떤 언어보다 달콤하고 중요한 소리”라고 강조한 바 있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설 때 건네는 “◯◯◯님, 이쪽으로 앉으세요”라는 한마디는 환자의 뇌에서 옥시토신(일명 ‘사랑의 호르몬’, 사람들 간의 신뢰와 친밀감을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침) 분비를 촉진해 긴장을 완화하고, 치료 협조도를 높이는 실질적인 임상 효과로 이어진다.
치과 진료는 정교한 기술(science)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인격적 교감(art)이 더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별도의 외부 광고를 하지 않아도 환자들이 소중한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불러드리는 치과를 꾸준히 찾아 주는 이유는, 그곳이 단순히 치아를 수복하는 공간을 넘어 ‘나의 존재를 온전히 기억해 주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쁜 임상의 시계추 속에서도 진료실 안을 환자분들의 소중한 이름으로 채워 보도록 하자. 이름을 정성껏 부르고, 그들의 존재를 기억해 주며, 성실히 치과 업무를 수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AI 생성형 불법 의료광고의 홍수 속에서, 우리에게 치아를 의탁한 소중한 사람들을 어루만져 줄 다정한 의술이자 치유의 시작일 것이다.
오늘도 우리 치과의사들이 부르는 그 소중한 이름들이, 진료실 안에서 따뜻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