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나를 슬프게 한 외국인 환자가 있었다. 시작은 평범했다. 구릿빛 피부, 투명한 눈빛을 가진 스무 살 외국인 청년이 체어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외모를 가진 사람은 대체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짧은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인사를 건넨 뒤 차트를 바라봤다. 차트에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심’이라는 메모와 함께 짧은 한 줄이 적혀 있다. “이를 빼주세요.” 옆에 띄워놓은 엑스레이를 다시 바라봤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닌데.’ 충치가 깊긴 했지만 신경치료하면 너무 멀쩡히 쓸 것 같은 #36 치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그 청년을 바라봤다. 그는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 너무 아프다는 뜻이었다. 이를 빼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통역해 주는 분이 들어왔다. 그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는 배를 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한 번 고기잡이배를 타면 2주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청년은 막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내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러니 안 아프게만 해달라.
잇몸이 부었다는 이유로 내원한 환자를 오전에만 열 명 가까이 만났다. 그래서 처음 그 환자를 마주했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또 치주치료를 원하는 환자인가. “왼쪽 치아가 흔들리고 얼굴이 부었어요.”라는 주소를 듣고 환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바로 직감했다. ‘아! 이 환자는 개인병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환자가 아니구나’. 가끔 환자의 엑스레이를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보일 때가 있다. 그날의 60대 남성도 그랬다. 남루한 옷차림, 때가 묻은 까만 손. 입안에는 남아 있는 치아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얼마 남지 않은 치아마저 검게 썩어 있었고, 얼굴 한쪽은 눈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이미 염증이 얼굴 전체로 퍼지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염증 범위가 너무 커요. 큰 병원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냥 약이나 처방해 주슈.” “지금 상태가 심각합니다. 입원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어요.” “싫소. 나는 그냥 약만 먹을 거요.” “…….”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막상 설득이 되지 않으니 난감했다. 월요일 아침이라 환자는 밀려 있었고, 내
하루 종일 치아를 들여다보는 치과의사지만, 결국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진료실은 치아만 치료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왔고, 나는 그들의 치아뿐 아니라 삶의 한 장면도 함께 마주하곤 했다. 막 한국에 도착해 서툰 한국어로 잇몸이 아프다고 울부짖던 외국인 청년도 있었고, 진료를 마칠 때마다 직접 구운 빵을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며 “드시면서 하세요”라고 웃어주시던 할머니도 계셨다.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마주하는 게 일상이지만, 어떤 환자는 어쩐지 시간이 흘러도 기억 속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오래 기억에 남는 환자가 한 명 있다. 특히 진료가 유난히 고되고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면, 나는 늘 그분과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분을 만난 건 30살 때, 대학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지금처럼 진료에 능숙하지도, 마음의 여유가 많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진료 인력이 부족했던 탓에 하루에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틈틈이 논문을 읽고 세미나를 준비한 뒤 다시 진료실로 뛰어가기를 반복했다. 한
치과의사로 살아온 지도 어느덧 17년. 그동안 수많은 환자를 만나고, 수많은 치아를 치료해 왔지만 지금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이 있다. 오히려 거의 매일 해야 하는 말이라 더 힘들고, 말하는 순간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한마디. “이를 빼야 합니다.” 환자에게 치아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처음 발치를 권유받는 환자에게는 그 상실감이 상상 이상으로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렇게 발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마치 큰 병이라도 선고받은 것처럼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분이 있는가 하면,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혹시 원장님이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라는 의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분도 있다. 사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환자들은 단순히 아플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다. 평생 함께해 온 자신의 치아를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에게 신체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그래서 발치는 치료가 아니라 거대한 상실로 느껴지는 것 같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 역시 “이를 빼야 합니다”라는 말을 꺼낼 때면 늘 긴장하게 된다. 혹시 조금이라도 더 살릴 방법은 없는지, 다른
“원장님, 유튜브에서는 발치 안 해도 된다는데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보니까 다른 치과는 훨씬 싸던데, 혹시 과잉진료 아닌가요?” 치과의사로 오래 일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충분한 검사와 임상 경험, 디테일한 설명을 거쳐 치료 계획을 제시했음에도 인터넷 검색 결과나 주변 사람들의 말이 더 신뢰를 얻는다. 혹은 대화 몇 줄로 얻은 챗gpt의 답변이 십수 년간의 임상 경험보다 더 전문적인 의견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그 순간들. 물론 당연하게도, 모든 환자가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과의사를 신뢰한다. 치료 과정을 믿고 따라오며, 협조적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진료를 하다 보면 상식과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의학적 한계 때문에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치료의 주의 사항과 부작용을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다”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례함에 당황한다. 근거 없는 의심과 비난에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가끔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날카롭게 각을 세우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
가끔은 아득하게 무서운 생각이 든다. 18년 동안 치과보존과 전문의로 살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신경치료를 했던가. 아마도 수만 개 치아의 구멍을 뚫고, 막혀 있는 근관 속을 탐색하고, 그 가느다란 공간에 선명한 주황색 가타퍼처를 촘촘하게 채워 넣었을 것이다. 0.5㎜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순간. 손끝 감각과 Root-zx에 의지해 막다른 골목을 헤매는 것 같은 그 수만 번의 순간들. 모든 치료를 마치고 마지막 엑스레이를 확인할 때면, 어쩐지 잘 키운 아들을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이제는 아프지 말고 잘 살아라’ 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사실 치료라는 게 늘 그렇다. 치과의사의 애정과 노력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아무리 내 손으로 완벽하게 끝냈다는 확신이 들어도 가끔은 탈이 나는 게 신경치료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잊고 신의 영역까지 넘보려는 오만을 ‘휴브리스(Hubris)’라 불렀다. 어쩌면 최신 장비와 논문, 치료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내가 이 치아를 완벽하게 치료했다. 그러니 탈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는 순간이 치과의사의 ‘휴브리스’일지도 모른다. 특히 인간의 힘으로는 완전히 통
삶에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즉, 모순 투성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건 내가 아직도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한국 고등학생이 그러하듯 대학을 정할 때는 보통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거창한 사명감이나 숭고한 꿈, 혹은 낭만 가득한 마음이 과연 존재할 여유가 있을까. 나 또한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해맑은 아이였다. 성적에 맞춰 원서를 썼을 뿐이다. 사실 재수 시절 내내 목표는 약대였다. 그런데 어라? 막상 수능을 보고 나니 점수가 남았다. (어떡하지) 잠깐 의대도 고민했다. (이런 고민하는 사람 또 있었을까?) 하지만 당시의 내게 레지던트까지 이어지는 시간은 너무 길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려 11년. 스물다섯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그 시절에, 서른 넘어서까지 수련이라니. “그건 좀…” 싶었다. 그런데 인생은 역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다. 내가 결국 보존과 전문의까지 따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인생은 앞뒤가 잘 안 맞는다. 모순 투성이다. 어쨌든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 2002년, 나는 치과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히는 예과 1학년 2학기 석고 카빙 실습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