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범 원장님 사진은 없는데요.” 김종범 원장의 진료봉사 사진을 요청했을 때, 서초구 보건소 관계자가 한 대답이다. 김종범 원장의 사진이 없는 이유는 사진을 촬영할 경황이 없다는 것. 거부반응이 심한 중증장애인을 전담해서 치료하는 김종범 원장이기에 사진을 촬영할 시간조차 없어 그간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17년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은 봉사서초구 보건소 장애인치과는 1996년 개설됐다. 故 기창덕 박사의 건의로 서초구 보건소에 장애인치과가 설립됐고, 김종범 원장은 개설된 1996년부터 현재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 달에 두 번씩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대학에서 소아치과를 전공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장애인도 치료를 많이 했었죠. 지금은 돌아가신 기창덕 박사님의 권유로 장애인치과에서 봉사를 하게 됐습니다. 1995년 개원을 했던 터라 정신이 없긴 했지만, 대학교에서부터 장애인들을 치료한 경험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습니다.”10년만 해보자는 마음에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는 김종범 원장. 하지만 10년을 훌쩍 넘겨 17년째 봉사를 하고 있다. 김종범 원장은 이제는 20년을 목표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나원이라는 곳이 있다. 통일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으로 새터민(탈북자)들이 한국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이다. 하나원에서는 새터민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하나의료원을 운영하고 있고, 기세호 원장은 매달 한 번씩 경기도 화천에 있는 제2 하나원에서 새터민들을 돌보고 있다. 최근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일부 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봉사의 시작 ‘배운 지식 베풀자’“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00년쯤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린치과봉사회(회장 김성문·이하 열치) 활동을 하면서 시작하게 됐죠. 사실 열치가 처음부터 봉사단체는 아니었습니다. 마음 맞는 치과의사들이 모인 일종의 친목단체였는데, 인원도 점차 늘어나면서 뜻 있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에 봉사를 하게 됐습니다.”친목모임에서 발전한 봉사회. 기세호 원장을 비롯한 열치 회원들은 인천 남동공단 무료진료봉사를 시작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본격적으로 봉사를 하게 된 것은 당시 문래동에 위치한 자유의 집에서 노숙자들을 진료해주는 것이었다. 문래동 자유의 집은 장안동으로 옮기면서 비전트레이닝센터로 명칭을 바꾸었고, 그곳에서도 열치의 봉사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배운 지식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 때문일까? 의료봉사를 하는 대부분의 의사들은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한다. 하지만 주지훈 원장은 다르다. 봉사를 위해서라면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더 많은 의료인의 참여를 유도한다. 봉사에 대한 주지훈 원장의 생각, 계획, 자세는 소위 말하는 ‘전투적’이다. 스케일도 남다르다. “뜻 깊은 일을 할 테니 지원해 달라.” 국내의 한 대기업으로부터 이동 진료가 가능한 5억 원 상당의 버스까지 지원받았다. 치과의사가 ‘도둑놈’이라고?“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치과의사에 대한 국민 인식을 바꿔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국민의 구강건강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수입을 거둔다는 이유로 ‘도둑놈’으로 취급받기 일쑤였죠.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치과의사들이 모여 뜻있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치과의사들의 선행이 언론을 통해 아무리 알려져도, 국민들의 인식은 ‘도둑놈’이었다. 주지훈 원장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었고, 충격이었다. 인식 개선을 위해 주지훈 원장이 선택한 길은 비수익사업과 수익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다. 비수익사업이란 인술을 펼치는
나에게 찾아온 우연한 기회대학시절부터 최재호 원장은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학업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됐다. 개원의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봉사’에 대한 열망은 마음속 한구석에 있을뿐, 쉽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해야하는 것도 많고 신경 쓸 일이 많다는 핑계도 한몫했다. 그렇게 평범한 개원의 생활을 하던 최재호 원장에게 봉사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는 본인 스스로 ‘큰사고’를 당하면서 예기치않게 다가왔다.“그때는 너무 크게 다쳐서 진료를 못하게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큰 후유증 없이 잘 나았고 치과의사가 되고 진료를 하는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몸이 회복된 이후 최재호 원장은 가장 가까이 있는 성가복지병원을 찾았다. 성가복지병원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위한 병원’을 모토로 어려운 이웃에게 정부보조금 없이 후원금과 봉사자의 도움으로만 운영되는 무료병원이다. 최 원장은 성가복지병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도움의 손길을 전하기 시작했다.봉사의 멘토를 만나다봉사활동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가족이었다. 사고를 당했을 때 봉사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부
이형란 원장의 치과에는 겉모습이 조금 다른 아이들이 자주 찾는다. 베들레헴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이다. 살레시오수녀회가 운영하는 베들레헴 어린이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25명. 이 중 국제결혼을 한 가정의 자녀들은 15명가량이다. 공통점이라면 한국인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온 외국인 엄마 혹은 맞벌이 이주노동자 부부 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점. 이 아이들은 토요일에 집에 돌아가 일요일에는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오니 일주일에 단 하루만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 이형란 원장은 성북구에 자리를 잡은 이후 베들레헴 아이들의 치과주치의는 물론 엄마 역할까지 대신하고 있다.봉사는 생활의 일부분가톨릭 신자였던 이형란 원장은 어려서부터 가족들과 함께 봉사를 다니면서 봉사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치대 본과에 진학하면서 가입한 봉사동아리 ‘뉴맨’을 통해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했다. 뉴맨은 ‘사회 정의와 좋은 사회를 구연하는 하나의 씨앗이 되자’는 이념을 가진 봉사동아리로 치대생이었던 이형란 원장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진료 중심으로 봉사에 참여하게 됐다. 뉴맨의 한 동기가 자신의 몸도 불편하면서 어르신 목욕봉사를 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희망을 제공하고, 꿈을 담아주고, 사랑을 돌려주자는 치과가 있다. 치과와 치과의사는 주변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받은 것을 나눠주기에 바쁜 치과의사. 휴가나 휴무는 지역에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떠난다는 권지용 원장은 지역사회 소외계층,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부터 환경연합활동, 지역 저소득층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쉴 틈 없이 봉사를 다니고 있다. 오늘도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잰걸음을 옮기는 권지용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권지용 원장은 치과의사는 사회로 받은 것이 많고 받은 것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개원과 동시에 어려운 곳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처음에 찾은 곳은 장안종합사회복지관이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무료검진과 진료를 진행했다. 한동안 봉사를 진행하던 권 원장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이곳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양한 방법을 찾았다. 이후 복지관은 물론 지역 내 절, 성당, 교회에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추천하는 이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전했다.“도움을 받는 어려운 이들은 다른 환자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생각에 치과를 방문해서 진료받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눈에 보였어요. 그들
매년 시월이 되면 수원여자치과의사회 앞으로 수많은 서류가 날아든다. 수원지역 인문계 고등학교 36곳에서 보내오는 장학금 수혜자 추천서가 바로 그것이다. 10여명의 고등학생들에게 1년간의 학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는 수원여자치과의사회는 고등학생 대상 장학단체로는 지급 규모나 기간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다. 엄마의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수원여자치과의사회 장학회의 가슴 따듯한 이야기를 들어봤다.마음을 나누는 모임에서, 마음을 전하는 나눔으로수원여자치과의사회(이하 수여치)는 1988년 김현순 원장이 수원에 개원하면서 태동했다. 수원의 48번째 개원의면서 소수의 여자치과의사 중 한명이었던 김현순 원장은 여자치과의사들의 구심점이 되어줄 모임을 만들었다. 그렇게 수원지역에 개원한 여자치과의사들이 함께 서로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정보를 나누면서 끈끈한 동료애를 나눠갔다.참여하는 여자치과의사가 늘어나고 구성원간의 우애가 돈독해질 무렵,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닌 더 의미 있는 모임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게 됐다. 함께하며 얻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나누어주기 위해 고민을 하던 중 우리사회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한 장학금을 전달하자는 데 의지가 모아졌다. 가정에서 아이
시흥에서 개원의로 생활하고 있는 김선 원장은 다양한 곳에서 여러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 원장은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다양한 봉사와 남북치의학교류협회 활동을 통해 직접 북한을 방문해 북한주민들에게도 진료봉사를 펼쳐왔다. 또 스마일재단 운영위원으로 장애인 진료에도 힘쓰는 등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모아네트워크를 통해 양질의 진료경험과 경영기법 공유는 물론 따뜻한 봉사의 정신을 확산시키고 있는 김선 원장을 만났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 어디든 간다시흥 외국인복지센터, 시흥뉴스 편집실, 스마일재단,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지역사회모임 등 치과를 비롯해 일주일에 김선 원장이 들르는 곳은 방방곡곡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고 할 일이 있는 곳이면 마다 않고 가다보니 직함도 여러 개다.“저야 그냥 평범한 개원의죠. 한 지역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제 도움이 필요하다며 이곳저곳에서 불러주고 그곳에 가서 힘을 보태다가 자연스럽게 봉사를 하게 됐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봉사와 나눔은 특별한 것이 아닌 제 생활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김선 원장의 다이어리에는 그렇게 봉사일정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 외국인복지센터를 찾아 지역 외국인노동자의 구강건강을 돌보
지난 2일 서울시장애인치과병원 로비에 마음 깊은 곳까지 포근하게 감싸주는 클라리넷 연주가 울려 퍼졌다. 여러 명이 연주하는 클라리넷이 하나의 화음을 만들고, 따뜻한 힐링 음악이 돼 장애인치과병원의 환자들과 의료진을 다독여주었다. 장애인치과병원은 물론 요양원, 나눔 콘서트 등 음악으로 행복을 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클라리넷 하우스 앙상블’. 단장을 맡고 있는 정해산 원장을 만났다.취미로 시작한 음악이 나눔의 매개로“학창시절에 따로 악기를 배운 적도, 배우려는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치과대학을 다니며 힘들고 지칠 때 클래식을 즐기는 정도였죠. 졸업 후 평범한 개원생활을 이어가다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는데요. 치과 운영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생각보다 큰 부담이더라고요. 이때 다시 클래식을 즐겨 듣기 시작했어요. 클래식은 저에게 정말인지 큰 힘이 됐습니다.” 박사과정을 마친 정해산 원장은 곧바로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두 차례 받던 레슨에 아쉬움을 느낀 정해산 원장은 비슷한 사람끼리 함께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연습실을 찾게 됐다. “연습하던 동료들과 정기적인 연주회를 갖곤 했습니다
2003년 인천시 계산동에 위치한 한 장애인 단체에서 시작된 인천장애인치과진료봉사회(이하 봉사회)의 활동이 어느덧 10년을 맞았다. 인천광역시치과의사회(회장 이상호·이하 인천지부) 소속 임원들과 회원들로 구성된 봉사회의 활약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돼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지금까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6,000여명의 장애인들이 봉사회의 따스한 손길을 거쳐 갔다. 그 중심에는 봉사활동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김건일 회장이 있었다. 10년 전 시작된 봉사의 씨앗“장애인들의 평균 수명은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 원인은 영양결핍입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거죠. 이런 장애인들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장애인 치과진료를 시작하게 됐습니다.”봉사회는 현재 인천지부 사무실 한 편에 어엿한 진료센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매우 초라했다. 장애인 치과진료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2003년.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위치한 한 장애인 단체로부터 장소를, 은퇴한 선배로부터 체어 등 진료에 필요한 장비를 기증받아 진료를 시작하게 됐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장애인들을
외국인 노동자 의료백서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에는 약 7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취업을 위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외국인 노동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 되고, 3저 호황으로 3D 업종을 비롯한 중소규모 제조업이 인력난을 겪게 되면서부터다. 외국인 노동자는 여전히 국내로 들어오고 있고, 그 숫자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3D 업종에 종사하는 대다수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싼 진료비로 인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치과진료 역시 마찬가지다. 편집자 주청년회의소 기념사업으로 첫 발 내딛어 “2004년 당시 외국인 불법체류 노동자는 국내에서 커다란 사회문제였습니다.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전반적인 시각이 좋지 않았죠.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국내에서 3D 업종에 주로 종사하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동남아 국가에 크게 이슈가 되면서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들이 많이 보도되던 시기였어요. 당시 저는 대구청년회의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소장으로 계시던 김
영등포 쪽방촌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 요셉의원은 영세민환자와 행려환자가 찾는 무료병원이다. 지난 26년간 내과, 외과, 산부인과, 피부과, 안과, 신경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에 영세민환자와 행려환자가 끊이지 않고 찾아오고 있다. 요셉의원 진료과목 중 먹는 즐거움을 찾아주는 치과의 인기는 가장 높다. 20명에 가까운 치과의사가 돌아가며 치과진료를 하고 있고, 이충규 원장은 22년간 요셉의원의 치과진료실을 지키고 있다.쉬운 봉사가 좋은 봉사에요~이충규 원장은 치과계 대표적인 의료봉사 단체인 녹야회의 일원으로 지난 1991년 8월 처음 요셉의원을 찾았다.녹야회는 이후 꽃동네 진료봉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충규 원장은 꽃동네 봉사는 물론, 매주 월요일 요셉의원을 찾아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한 주의 첫 시작인 월요일, 매주 빠짐없이 요셉의원을 찾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이충규 원장은 “내가 잘하는 것을 나눌 뿐”이라며 “개인치과가 아닌 요셉의원에서 환자를 만나는 것도 진료의 연장이다”고 말한다.이 원장은 “봉사는 보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며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오랫동안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봉사가 아니라 맛있는 밥을 먹으러
한 곳에서 43년째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원장과 그 옆에서 37년 동안 성심껏 원장을 도와가며 함께 해온 스탭이 있다. “이런 일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실제 얘기다. 주인공은 바로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위치한 한성훈치과. 한성훈 원장과 맹정숙 간호조무사는 처음 만난 1977년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와 딸 같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을 만나 37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들어봤다. 원장과 스탭이 아닌 ‘한 가족’“21살에 원장님을 처음 만났으니까, 올해로 37년째 원장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결혼과 출산 등의 이유로 일을 그만두려고 한 적도 몇 번 있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원장님께서 따뜻하게 배려해주셔서 지금껏 잘 일하고 있습니다. 당시 원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데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제는 원장님께서 그만두라고 하셔도, 제가 원장님 곁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아요.”37년 동안 한성훈치과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맹정숙 실장은 스탭을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한성훈 원
주말마다 ‘변신’하는 두 얼굴의 치과가 있다. 평일에는 여느 치과처럼 일반 환자들을 진료하지만, 토요일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진료소로 바뀌는 서울이웃린치과의 홍수연 원장을 찾았다.토요일 무료진료는 기본적인 치과진료부터 틀니·임플란트·교정 등 고가의 진료까지 가리지 않고 이뤄진다. 이미 진료를 받은 저소득층 환자도 300여명에 달한다. 사회복지사가 상주하면서 지역사회단체, 미혼모단체, 탈북자단체 등 20여곳에서 소개하는 환자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고 있는 홍수연 원장과 4명의 치과의사는 4년째 보람된 주말을 보내고 있다.‘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치과의사의 길치과대학을 다니면서 홍 원장이 가슴 아팠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필수적인 치과 치료의 많은 부분이 건강보험에서 제외돼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먹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치과진료조차 못 받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 졸업 후 보건학과 공공정책 등을 따로 공부할 정도로 열정을 쏟은 시절도 있었다.어느날 인도의 비노바 바베의 말이 홍 원장의 가슴을 쳤다. ‘당신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지금부터 그 꿈꾸는 세상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라!’그 후 지역
지난 2009년 제1차 몽골 진료봉사를 시작으로 오는 22일 제5차 진료봉사를 떠나는 서울의료봉사재단(이사장 조병욱). 구순구개열 환자 무료수술을 비롯해 일반 치과진료에 이르기까지. 이미 몽골에서 서울의료봉사재단의 따스한 손길을 거쳐 간 환자는 현재 1,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여기서는 전신인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간 서울의료봉사재단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본다.봉사의 시작!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서울의료봉사재단의 전신은 지난 2008년 7월 법인설립 허가를 받은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이다. 2001년 국제로터리 3750지구 발안 로터리클럽에서 실시한 필리핀 구순구개열 아동 무료 수술사업이 단초가 돼 조병욱 이사장, 한국재 상임이사, 박영주 실행이사 등을 중심으로 몇몇 치과의사들이 뜻을 모아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을 설립하게 됐다.이후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은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국제 의료봉사를 통해 국가 간 협력과 교류 증진을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의 첫 해외봉사활동은 몽골이었다. 몽골 보건복지부, 그리고 한몽교류협회 몽골지부와 의료 협력에 관한 MOU를 체결하고 몽골에 추양진료센터를 개설하는 등 추양국제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