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 오디세이가 한창이다.《일리야드(Iliad)》와《오디세이(Odyssey)》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인류 서양 문학의 최고 고전으로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준다는 황금사과로 시작된 분쟁은 결국 트로이 전쟁을 유발했다. 전쟁영웅 아킬레우스가 죽기 전까지가 일리야드고, 트로이 목마를 만든 장수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귀향하기까지가 오디세이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반면 집에서 기다린 아내는 10년 전쟁을 포함해 20년을 기다렸고 결국 남편을 만나 왕위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신화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있다. 중국 서유기 주인공인 현장법사는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출발해 인도를 다녀오는 데 16년이 걸렸다. 사마천의《사기(史記)》〈진세가(晉世家)〉에 진나라 왕자 중이는 계모의 모함을 피해 해외를 떠돌며 왕이 되기 전까지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였다. 불교 선종의 시조 달마조사는 벽만 바라보는 면벽(面壁) 수행을 9년 동안 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렇게 무엇이 이루어지기까지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리는 경
사람이든 동물이든 집단이 형성되면 룰이 생기고 권력이 탄생한다. 더불어 권력을 견제하는 힘도 같이 생겨서 균형을 잡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권력이 강해지거나 견제의 힘이 상실되어 힘의 균형이 깨지면, 그 집단은 망하고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것이 자연계 이치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권력을 선출자에게 위임한다. 위임받은 권한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이 책임은 권력이 커질수록 더욱 무거워진다. 하지만 최근 많은 지방자치 현장에서 이런 민주주의 원칙이 뭉개지고 아직도 후진국 행태를 보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독 지방의회 시의원의 성비위사건이 많다. 전형적인 권력 남용의 행태다. 대전, 안동, 부천, 의왕 시의원의 성추행사건과 청주시의원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이 있었다. 택시비를 안내고 지구대에서 주취난동을 벌인 춘천 여성시의원의 행태는 성별을 넘어 그들의 도덕적 해이와 권력에 만취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정윤기 사건에서 보인 경찰 조직의 제 식구 감싸기 모습과 ‘거제왕’으로 불린 지방 경찰 간부의 행태는 생각보다 깊숙이 썩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 행위와는 다른 문제다. 일부 사건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였고, 일
최근 ‘한국인 정신건강, 세계 최하위권…18개국 중 17위’라는 보도를 접했다. 보험회사 AXA와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18개국 성인 1만9,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 한국인의 정신건강 지수는 58.5점으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전체 평균은 61.8점이었으며, 태국이 66.5점으로 가장 높았다. 경제적 부담과 업무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정신건강 문제를 상당수가 전문가보다 AI에게 상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번의 조사 결과만으로 한 나라의 정신건강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실을 보면 정신건강이 낮게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예측된 필연적 결과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경쟁이 매우 치열한 사회다. 3세 고시로 시작되어 학교는 배움의 장소가 아닌 성적을 올리는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대학 졸업은 취업을 위한 경쟁이다. 직장에서는 승진과 소득에 비교되고, 결혼 후에는 주거와 재산에 비교된다. 중년은 자녀 교육과 사회적 성공에 치열하고, 노년은 은퇴 자금에 고민한다. 결국 무덤에서 요람까지 평생 지속된다. 특히 한국 사회는 ‘남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사회적 비교 심리가 강하
역사적으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아본 시대는 없었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전쟁 아니면 흉년으로 늘 굶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굶는 사람은 없으니 엄청난 발전이다. 하지만 기준이 다르기에 예전이나 지금이나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주식시장은 변동성이 역대급이고, 환율은 1,500원 심리적 저항선을 넘었다. 영끌한 2·30대가 끌어올린 집값과 과도한 대출에 불안감이 큰데 금리가 올랐다. 자영업자는 매출 감소와 비용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100만명 이상 폐업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이란전쟁은 재점화되어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혼란할 때 개인은 휩쓸리기 쉬워서 정신과 마음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 자체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심리적 불안이 더 커진다. 인간의 뇌는 현실 위험보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다. 경제가 불안하면 노후가 걱정되고, 주식이 떨어지면 재산이 줄어든다. 뉴스를 보면 걱정이 커지고, 걱정을 잊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찾는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정보를 찾지만, 오히려 넘치는 정보가 더 많은 불안을
요즘처럼 주식시장 변동성이 큰 시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아침에 스마트폰을 열고 웃다가 오후에 후회를 한다. ‘영끌’로 레버리지에 투자한 사람이라면 주가의 작은 움직임조차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정선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는 사람의 심리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물론 주식과 도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투자하는 사람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도박꾼 마음으로 변해버릴 수 있다는 경계가 모호한 점에서 심리학은 중요한 경고를 준다. 심리학에 ‘변동적 보상(Variable Reward)’이 있다. 보상이 일정하지 않고 언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을수록 사람은 더욱 강하게 그 행동에 몰입하게 된다. 슬롯머신이 사람을 중독시키는 이유다. 대부분은 돈을 잃지만, 가끔 찾아오는 큰 당첨이 뇌 속 도파민을 폭발적으로 분비시키면서 다시 레버를 당기게 만든다. 주식시장도 이러한 심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어느 날은 하루 만에 수십 퍼센트가 오르고, 또 어느 날은 이유조차 알기 어려운 하락이 찾아온다. 한 번 큰 수익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실력으로 얻은 결과라고 믿기 쉽다. 심리학적 용어로 ‘과잉확신
한 유명한 코미디언이 미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월드컵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는 지난해 미국에서 일어난 한국인 기술자들 추방의 연장선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이와 유사한 일들은 있어왔다. 1492년, 스페인에서 알람브라 칙령(유대인 추방령)이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며 국토회복운동을 완성한 스페인 왕정은 가톨릭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원했다. 왕정은 바로 스페인 영토 내의 모든 유대인에게 4개월 안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당시 왕정의 눈에 유대인은 가톨릭 제국의 순수성을 해치는 불순물이자, 쫓아내도 그만인 외지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제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스페인의 금융, 상업, 의학, 행정 등 경제와 지식의 중추를 지탱하던 핵심 인재들이었다. 이들이 전 재산을 헐값에 매각하고 네덜란드, 영국 런던, 오스만 제국 등으로 쫓겨났다. 그 후 스페인의 경제적 혈맥은 순식간에 끊어졌다. 금융·상업 인프라를 상실한 스페인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재정 파탄을 겪으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이들을 포용한 네덜란드와 영국은 전 세계 금융과 상업 중심지로 우뚝 섰다. 유사한 사건은 기원전 237년에도
최근 주식 시장이 9,000선을 넘나들며 전례 없는 호황과 극심한 변동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매일 밤낮으로 화면 속 빨간색과 파란색 그래프가 춤을 출 때,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요동친다. 이런 거대한 돈의 흐름은 개인의 일상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다. 하루에 수 백만원이 오르고 내리면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주식 그래프와 수익만 수시로 체크하게 된다. 심지어 빚투가 극심한 지경에 이르러 주식이 투자라기보다는 투기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 주식은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업의 위험 분산과 자본의 대중화로 시작되었다. 주식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금융 공학의 정교한 계산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500여 년 전 유럽 한 나라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건의 나비효과에서 비롯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알람브라 칙령(유대인 추방령)이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며 국토회복운동을 완성한 스페인 왕정은 가톨릭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원했다. 왕정은 바로 스페인 영토 내의 모든 유대인에게 4개월 안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왕정의 눈에 유대인은 가톨릭 제국의 순수성을 해치는 불순물이자, 쫓아내도 그만인 외
5년 전 2021년 7월 2일, 유엔(UN) 총회 산하 상설 기구인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한국 지위를 개발도상국그룹에서 선진국그룹으로 격상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 후 반도체, 군수, 선박 등 첨단 산업은 물론이고 K-뷰티, K-팝, K-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눈부시게 발전했다. 심지어 라면, 김밥, 김과 같은 지극히 서민적인 먹거리 문화까지 수출이 호황이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지구촌에 널리 알려진 시대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분야가 있다. 교육이다. 문맹률이 최저이고, 교육 열기가 최고인 나라에서 교육현장은 붕괴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참교육’이 세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무너진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전권을 위임받은 감독관이 등장하여 학교폭력 가해자와 악성 학부모들을 거침없이 단죄하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주지만, 역설적으로 이 드라마 인기는 지금 우리 학교 현장이 얼마나 깊게 병들어 있는지를 반증한다. 게다가 정작 학교 현장에서 들려오는 실제 이
한국사를 보다 보면, 역사에서 금해야 하는 ‘만약’이란 단어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최근 흥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처럼 세조가 쿠데타를 하지 않고 단종이 지속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급격한 왕권 약화로 또 한 번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새 왕조는 개화기 때 일본 메이지 유신처럼 개방하여 일제 강점기가 없었을까. 인조반정 후에 논공행상에서 이괄에게 일등공신을 부여하였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인가. 인조반정의 군사 총지휘자였던 이괄이 이등공신이 되면서 불만이 생겼고, 이괄은 국경 군사로 반란을 하여 국방 수비가 허물어졌다. 패한 반란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치고, 그들이 인조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청의 앞잡이가 되어 침략을 충동하며 정묘호란이 발생하였다. 만약 이괄에게 일등공신을 주었다면 정묘호란은 없었을 것인가. 역사의 한 시점에서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는 그 시점을 잘 잡는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드라마는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분당 땅 투기, IMF 등 미래 예측 등으로 돈을 버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처럼 개인에게도 ‘만약에’란 단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10년 전이라면
2015년부터 22년간 서울 한 병원에 자해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가 4,452명이었다. 그중 24세 이하가 1,445명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1983년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전 국민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규 방송이 중단되고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라는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한 이웅평 소령이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귀순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서울 시내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가기 위해 한강 다리로 몰려든 차량과 인파로 인해 서울 교통은 마비되었고, 그날 한강을 건너 강남으로 넘어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전화통화도 모두 불통이었다. 서울시민은 처음 고립을 경험했다. 이 극적인 사건은 정치·군사적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나비효과가 지금도 강남에 이어지고 있다. 그날 이후 강북의 부자들이 강남으로 이사 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진짜 부자들은 모두 강북에 살았다.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종로, 성북동, 한남동 등이 그들의 터전이었다. 당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던 강남은 그저 흙먼지 날리는 거대한 공
최근 스타벅스 사건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이 비상식적이다. 마치 좌우 진영의 이념적인 이슈인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사회 구성원의 역사의식에 있고, 역사의식의 문제는 존립에 문제를 준다. 역사인식은 개인적인 다양성으로 접근할 수 없다. 공동체가 존립하기 위한 최소 단위가 역사인식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다양성이라는 이유로 이순신 장군을 비하하거나, 일제 강제 통치를 지지하는 생각을 지닌 자라면 이 땅에서 떠나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사회와 격리되어 비전향 장기수처럼 옥중투쟁을 하면 된다. 한 국가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세계가 주목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세대의 피와 땀 그리고 보이지 않는 희생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위상은 우연이나 자연 발생적인 결과가 아니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전후 폐허에서 배고픔을 온몸으로 버텨낸 조부모 세대의 희생이 후진국을 건너는 기초를 깔았다. 그 위에 개인의 안락함을 기꺼이 포기하며 낮과 밤 없이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내가 개발도상국을 넘는 기적을 만들었다. 이 두 세대는 결
한자에 遊(놀 유)와 悠(멀 유)가 있다. 유람(遊覽)과 유희(遊戱)에서는 ‘유(遊)’를 사용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과 유구하다(悠久)에서는 ‘유(悠)’를 사용한다. 이 두 글자의 공통점은 즐거움에 있다. 유(遊)는 몸을 움직이면서 얻는 즐거움이고, 유(悠)는 마음의 작용이다. 쉽게 요약하자면 遊는 ‘공간적인 움직임과 즐거움’이고, 悠는 ‘시간·공간적인 아득함과 마음의 여유’를 뜻한다. 고전 장자는 소요유(逍遙遊) 편으로 시작된다. 소요(逍遙)란 노닐며 걷는다는 의미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는 소요(逍遙)하면 진정한 유(遊)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이 자유로워야 완벽한 자유가 된다. 몸이 완전한 자유의 유(遊)를 얻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마음이 걸리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을 갔는데 부모님이나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프다면 결코 몸이 자유로운 여행이 아닌 것이다. 유(遊)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한마디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자유다. 마음이 편해야 몸도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유(遊)와 유(悠)는 상호 필요조건이다. 마음이 편해야 몸이 편하고, 몸도 자유로워야 마음도 편해진다. 장자가 말한 유(遊)는 마음의 유(悠)를
요즘 초등학교에는 소풍이 없다. 1996년 교육개혁 때 소풍(逍風)을 학습의 연장선에 두어 현장체험학습이란 말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참 무지한 행위였다. 소풍(逍風)을 그저 놀고 구경이나 하는 놀이라 생각한 한심한 결정이었다. 소풍(逍風)에서 ‘소逍’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유래하여 세속에 걸리지 않은 자유를 의미하며, ‘풍風’은 신라시대 화랑도의 원류인 풍류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처음 학교에 소풍을 도입한 교육자들은 이런 것을 모두 감안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위정자들이 단순한 생각에 소풍이란 단어를 현장체험학습이란 용어로 행정화시켰다. 용어는 내용을 바꾸는 힘이 있다. 소풍이 현장체험학습으로 바뀐 순간 즐거운 소풍은 일이 되고 짐이 되었다. 급기야 지금은 소풍이 사라졌다. 가장 큰 이유는 무능한 법원이다. 교육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2022년 강원도 속초에서 현장체험학습을 간 초등학생이 후진하는 차에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이 재판에서 담임교사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참 무능한 판결이다. 법원이 교육을 학살한 사건이다. 법적 잣대로 이대목동병원 소아전문의를 구속시킨 사건과 유사하다. 결국 소아전문의
광주에서 길을 가던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남자에게 무동기(묻지마) 살인을 당했다. 잡힌 범인은 사는 게 재미없어서 자살을 하려다가 범행을 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황당하고 참담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는 2023년 분당 서현역 백화점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사건과도 유사하다. 심리학적으로 반사회적 성격장애 혹은 정신의학적으로 조현병일 가능성이 의심된다. 이것은 전문가가 심도 있게 판단할 것이다. 만약 “어떤 음성이 범행을 지시했다”는 환청이나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한다”는 망상 등에 의해 범행했다면 조현병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범인 진술대로 사는 게 재미없어서 자살하려다가 범행을 하게 되었다면 반사회적 성격장애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감정 해소 도구로 사용한 행태로 전형적인 특징이다. 죄책감 결여 등으로 사회적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희박하며,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입힐 고통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충동성과 자극 추구 경향이 강하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진술은 극심한 허무주의 뒤에 숨겨진 자극 추구 성향을 드러낸다. 일상의 무료함을 타파하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선택하는 것으로 정서적 조절 능력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얼마 전 한 초등학교에서 고학년 아이들의 싸움이 있었다. 교사가 아이들을 화해시키고 서로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한 아이가 이를 거부하고 교사를 폭행했다. 교사는 교권보호위원회를 신청했고, 부모는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다. 이 사건은 얼핏 보면 단순히 아이의 성격이나 부모의 성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해 감정을 이입시킨 것으로, 간섭이 아닌 지배의 형태로 생긴 문제로 보인다. 근래 부모가 자살을 선택하기 전에 아이들을 먼저 죽이는 일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런 행동은 심리학적으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부모가 분리되지 못한 자아로 인해 아이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생각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은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심리적 구조의 일부로 생각하는 현상을 ‘자기대상(Self-object)’이라고 정의했다. 정상적인 발달 과정에서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 돼야 하지만, 부모가 도리어 아이를 자신의 거울로 삼는 경우다. 교사가 아이에게 사과를 요구했을 때, 부모가 아동학대로 고소한 심리의 밑바닥에는 강렬한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다. 부모는 아이 잘못을 아이의 독립된 행위로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