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길모퉁이 서점에 취향의 마킹을 남긴다

2023.11.13 10:22:05 VOL.177/2023가을겨울호

밤의서점에서 일어나는 일
글 / 김미정 [사진제공 밤의서점, 한여름, 김재관]

 

“러바오가 아이바오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최근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판다 가족의 영상에서 마킹 중인 판다를 보며 사육사가 한 말이다. 동물이 체취를 남기는 마킹 행위를 ‘서로에게 편지 쓰는 일’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시적으로 변화된다. 가만, 그러고 보니 애서가들이 서로에게 마킹을 남기는 공간이 서점 아닌가.

 

“나는 이런 책이 좋은데, 너는 어때?”

“이 작가의 문장에 반했어. 한번 읽어봐”

 

귀를 기울이면 책방 한쪽에서 조곤조곤 취향을 교환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7년 전, 연희동에 닻을 내린 밤의서점은 방문자들이 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오래도록 품고 있던 무언가를 시도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응원해주는 안전기지가 되었다. 점장들이 상상했던 ‘마음의 빛을 찾아가는 한밤의 서재’가 된 것이다. 건축가 김현진은 에세이 <진심의 공간>에서 “책의 공간을 만드는 일은 공간의 주인공들을 이해하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밤의서점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서점 초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책과 밤이 주인공이었지만, 7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서점 곳곳에 방문자들의 숨결과 취향이 덧입혀졌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4시간 만에 책을 받는 시대에 동네 서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이들은 어쩌면 간절하게 자신의 체취를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취향을 마킹하고, 다른 이들의 취향을 읽으며 그렇게 은근히 서로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밤의서점 방문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는지, 몇몇 장면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느 저녁, 카운터 앞

 

“점장님, 예약한 생일문고 찾으러 왔습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은 며칠 전 생일문고를 5권이나 예약하고 오늘 찾으러 온 참이다(밤의서점 생일문고란 책 등에 작가의 생일만 남기고 포장한 블라인드북이다).

 

“에고, 들고 가기 무거우실 것 같아요.”
“오늘 고등학교 동창모임이 있거든요. 친구들 생일에 맞춰 주문했어요. 모임 자리에서 나눠주려고요. 지난 번 회사 모임에서 선물했을 때 반응이 진짜 좋았거든요.”
“와, 기발한 아이디어네요.”

 

베스트셀러라는 정형화된 방식으로 책을 만나기보다, ‘생일이 같은 작가’라는 우연성을 통해 기꺼이 책을 만나는 모험에 뛰어드는 사람들. 그들은 블라인드북이라는 모험을 친구들에게 열렬히 전파하는 중이다.

 

 

#2. 어느 토요일의 밤의 북클럽

 

“혼자 사는 삶을 진지하게 고민중이었는데, 나만 비정상인가 싶어 외로웠어요. 여기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을 만나니 머리가 확 트이는 것 같습니다.”

 

비혼 1인가구를 다룬 책 <에이징 솔로>를 함께 읽는 북클럽 자리였다.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석자들은 결혼과 육아라는 과제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느낌에 시달리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한 권의 책을 같이 읽으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했다.

 

결국 북클럽에서 만난 네 사람은 매달 ‘비혼으로 살아가기’에 관한 책을 읽는 모임을 따로 꾸리기까지 했다. 취향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책방에서 만난 분들은 적극적인 취향의 마킹을 통해 삶을 함께 나눌 동지들을 발견한 것이다

 

 

#3. 사랑하는 친구의 눈에 담긴 서점 풍경

 

“이 책을 고백서가로 선물하고 싶습니다.”

 

책을 내민 손님에게 점장은 밤의서점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건네준다. 그는 책상에 앉아 펜을 쥐고 엽서에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는다. 카톡이나 디엠보다 특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마음 전하기, 밤의서점 고백서가 서비스다.

 

점장은 손님의 책과 편지를 포장한 후, 받는 분에게 문자와 서점 약도를 보낸다. ‘OOO 님 앞으로 책과 편지가 도착해 있으니, 이 약도에 적힌 장소로 와서 찾아가주세요’라는 메시지다. 며칠 후 책을 받으러 온 손님의 얼굴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서려 있었다.

 

“너무 힘든 시기에 밤의서점이 보낸 이 문자를 받았어요. 그런데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그 친구가 왜 나에게 이걸 보내줬는지 알 것 같네요. 한동안 못 잊을 것 같습니다.”

 

고백서가를 수령하러 온 손님은 책과 마음이 담긴 편지, 그리고 친구가 사랑한 이 밤의서점의 풍경을 함께 선물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주로 혼자 오신 손님에게만 살짝 알려드리는 ‘이야기 상자’가 있다. 한 장 정도 자기 이야기를 쓴 편지를 점장에게 주면, 다른 손님이 쓰고 간 편지와 교환해드린다. 각종 SNS에 매 시간 접속해 있으나 정작 진정한 연결은 경험하지 못하는 오늘날 세대에게 익명의 누군가와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교환하는 경험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서점 안으로 조용히 한 손님이 들어와 점장에게 편지를 내민다.

 

“편지 교환하는 그거, 할 수 있을까요?”

 

 

#4. 할로윈 일주일 전

 

“밤의서점 어둠의문고, 할로윈을 맞아 단 열흘 간만 특별 판매합니다. 까만색 포장지 안에는 추리 및 호러 소설이 들어 있어요. 포장지 겉면에 적힌 키워드만 보고 고르시는 거예요. 점장이 직접 그린 할로윈 그림 스티커도 소장하세요.”

 

밤의서점 인스타와 트위터에 공지가 올라가자, 댓글과 디엠이 속속 도착한다.

 

“우앙, 너무 재밌는 이벤트네요. 저 오늘 저녁 들를 건데, 한 권 예약되나요?”
“지방에 사는데 택배로 받을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독서가들은 책 내용과 수상작이라는 권위에 의존해 책을 골랐다. 독서취향이 굉장히 확고한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 독립서점을 방문하는 젊은이들은 취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패키징과 특이한 스토리,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열광한다.

 

그들은 친구들과 독립출판물이나 굿즈를 만들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북도서전에 직접 출품하기도 하고, 각종 전시회에 간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며 취향을 증명하기를 즐긴다. 점장들의 독서 취향이 섬세하게 큐레이션 된 독립서점은 그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다.

 

곳곳에 키오스크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을 마주하기보다 액정을 보는 게 편한 시대가 되었다. 노트북만 있으면 24시간 영화와 드라마와 각종 영상이 쉴 새 없이 스트리밍되는 시절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불편을 감수하고 길모퉁이에 불을 밝힌 서점의 문을 연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 나와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려는 다정한 마음, 혹은 자신과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싶은 선선한 마음들이 동네 한구석의 서점으로 모인다.

 

그곳에 가면 일상의 고단함을 함께 넘어갈 친구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책에 코를 박고 있을지도 모른다. 밤의서점은 불을 밝히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판다가 마킹을 하듯 밤의서점에 당신의 취향을 마음껏 남기고 가시길.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열렬한 마음을 담아.

 

글 / 김미정 점장(밤의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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