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음을 당했다"

2024.01.13 08:31:21 제1048호

치과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이야기(645)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낳음을 당했다’라는 단어가 유행한다고 한다.

 

이 말속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는 속마음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섬뜩하다. 뒤집어 말하면 돈이 없으면 아이도 낳지 말라는 의미다. 심지어 자식이 부모에게 “돈도 없으면서 왜 날 낳았나요”라는 패륜적 말에 합리성을 부여하려는 경향마저 보여서 안타깝다.

 

최근 출산율 0.78%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SNS에 가난도 가정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글도 있다. 물론 그들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 말이 잘못되었음을 설명하려 하니 막상 말문이 막힌다. 너무나 당연한 명제를 증명하라는 수학 문제를 받았을 때처럼 생각이 막히는 느낌이다.

 

최근 당연한 명제들이 파괴되는 현상을 많이 목격했다.

 

‘엄마는 아기에게 자신 목숨보다도 더 무한한 사랑을 준다’는 참 명제가 광주 아기투척사건으로 깨졌다. 어려서 버린 자식이 죽자 수십 년 만에 나타나 보험금을 가로챈 비정한 엄마의 행동이 ‘내리사랑’이라는 명제를 파괴했다. 최근 급격히 증가한 존속 사건들로 오랜 세월 내려온 ‘부모자식 간은 천륜’이라는 명제도 흔들리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명제들이 하나씩 깨지고 변하면서 이제 부자가 아닌 부모는 그 자체로 자식 학대라 비하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사회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대부분 선진국은 미국처럼 자식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독립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선진국이라고 하면서 자식들은 돈 많은 부모를 요구하는 것일까.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 생각해보니 표준과 평균의 극상위 이동으로 귀결된다. 세상은 표준정규분포를 따른다. 상위 5%와 하위 5%를 제외하고 중간이 90%다. 그런데 사회가 언제부터 상위 5%를 표준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키가 180㎝를 당연히 넘어야 하고 키가 작으면 루저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는 외제차 정도는 타야 중류층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얼굴은 최소한 연예인과 비슷한 정도는 돼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TV 드라마에 나오는 상류층의 좋은 집이 표준이 되었고,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 기준이 되었다. 5%에 속하지 못하는 95%는 결국 상대적 빈곤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에서 고립은둔 청년이 54만 명이고, 그들 10명 중 8명이 자신은 하층민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자료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항목이 있다. 그들 중 75.4%가 대학 졸업자이고 심지어 5.4%는 대학원 이상 졸업자였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고립은둔을 하게 만들었을까. 대학과 대학원 졸업자가 80%를 넘는 것을 보면 지식과 학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아마도 자신이 생각한 이상과 현실에서 온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며 고립과 은둔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모찬스를 이용한 자들을 넘지 못하는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에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지닌 구조적 문제에 막혔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기준으로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고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에 따른 의무를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미국처럼 개인의 독립과 자립에 대한 교육이 철저하게 이뤄져야 하건만, 우리교육은 자립과 독립에 대한 교육은 고사하고 엄마의 간섭이 대학 학점을 넘어 군대까지 미치고 있다. 개인적 독립과 자립을 배우지 못한 상황에서 사회전반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상향 기준화로 인해 스스로 미치지 못하면 루저라는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결국엔 자식에게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서 자식을 낳아 100만 원짜리 패딩도 못 입는 루저 자식을 만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그들에게 천륜과 내리사랑을 이야기하고,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을 해준들 가슴에 닿을 것인가. 1등을 강요하던 부모들에게 ‘낳음을 당했다’는 고지서로 되돌아왔다. 부모에게 가장 가슴 아픈 말이지만 그 말을 하는 그들 또한 깊은 아픔을 지녔다. 하루빨리 우리 사회가 아픔 없는 진정한 선진국이 되길 바란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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