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의 처음과 끝,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2021.05.07 14:05:44 2021SS

파리의 작은 미술관에서 만나는 위대한 예술가 이야기 #2
글·사진 안성규(프랑스 미술관 국가 공인가이드)

 

미술관으로 가면서
파리에 여행을 와서 경험하는 기쁨 중에 하나는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과 그 인생을 만나는 것이다. 그중 전 세계인들의 큰 사랑과 관심을 받는 화가 중 한 명은 19세기 인상주의의 대가, 클로드 모네이다. 수련을 그린 화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네는 기존의 고전주의적 예술을 과감히 탈피하고 완전히 새로운 빛의 순간성을 화폭에 담아냈다. 짧고 거친 붓 터치들로 표현되는 자연과 인물의 형태는 깨지고 흐트러지나 그 안에 담겨 있는 형형색색의 물감들은 마치 드뷔시 피아노 연주에 맞춰 몸을 흔드는 듯하다. 이러한 모네 예술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하여 파리의 여행객들은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하고 특별히 수련 파노라마 대작을 보기 위해 오랑주리 미술관을 찾는다.

 

더 나아가 그의 생가인 지베르니의 정원을 방문하여 화가의 인생과 예술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면서 큰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사실 파리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모네의 작품이 가장 많은 미술관은 파리 16구 에펠탑 근처에 위치한 마르모탕 미술관이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성수기에도 한가한데 여기에선 관광객뿐 아니라 파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함께 감상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으로 인해 지친 우리의 몸과 영혼을 힐링시켜 주는 한적하면서도 아늑한 공간과 그 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클로드 모네의 초창기부터 죽기 전까지 즉, 모네 예술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자, 미술관에 도착했다. 대표 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예술 인생을 돌아보자.

 

 

프랑스 역사가 폴 마르모탕(Paul Marmottan)은 아버지 쥘 마르모탕(Jules Marmottan)으로부터 물려받은 본 건물을 확장하여 자신의 소장 컬렉션을 이곳에 보관했다. 폴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소장되고 있는 작품들과 건물은 프랑스 학사원에 유증이 되었고 1934년 마르모탕 미술관으로 탄생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기증자들에 의해 컬렉션은 점점 풍성해지는데 1966년 클로드 모네의 둘째 아들이었던 미셸 모네(Michel Monet)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작품을 기증함에 따라 세계 최고의 모네 컬렉션을 구축하고 있는 미술관이 되었다.

 

 

인상주의의 시작, ‘인상, 해돋이’
자연의 풍경이 인물의 배경 차원을 넘어 본격적으로 작품의 중심적인 주제가 된 것은 19세기 초 자연주의에 이르러서다. 밀레, 코로, 루소 등의 화가들은 빛을 관찰, 연구하면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자연을 표현하지만 자연주의의 사실성과는 분명히 다른 예술, 인상주의(Impressionisme)가 드디어 도래했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표현이 아닌 어떤 대상을 보고 화가가 느낀 주관적인 느낌대로 그림을 그렸던 에두아르 마네를 시작으로 하여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많은 화가들이 동시대에 쏟아져 나왔다. ‘인상주의’라는 말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1874년 ‘무명 화가, 판화가, 조각가 협회 독립전시’가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아틀리에에서 열리게 되었고 여기에 모네도 참여했는데 이때 “인상, 해돋이”도 전시되었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 모네가 외젠부댕에게 그림을 배웠던 르아브르(Le Havre) 바닷가의 해돋이 모습을 그린 것으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네는 해돋이의 사실성을 그려낸 것이 아닌, 해가 떠오르면서 그의 눈에 담긴 변화하는 빛의 순간성을 포착하여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평가이자 기자였던 루이 르로이(Louis Leroy)는 본 작품을 보고 “인상적이다”라며 비아냥거리면서 이것은 아기 수준의 벽지만도 못한 그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이러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던 작가들을 ‘impressioniste’라고 부르기까지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인상주의’라는 예술 사조의 이름을 낳게 만든 사건이 되었다. ‘19세기의 중심이 되는 예술사조의 이름을 탄생하게 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라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 미술관을 꼭 방문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파리 풍경
1874년 1회 인상주의 전시를 통해 모네를 비롯한 독립적인 화가들은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지만 몇몇 깨어있는 비평가들을 제외하고 주변의 반응은 싸늘하였다. 경제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모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창작의 열정을 계속해서 불태웠는데 자연의 풍경뿐만 아니라 근대화되어 가는 파리 도심에 매력을 느껴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생 라자르 역(Gare de Saint-Lazare) 시리즈이다. 근대 공업기술의 산물인 기차역을 그리면서 모네는 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빛에 집중하였다. 철도 근로자들과 빨간 신호등, 기관차,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유럽 다리’ 모두 자욱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증기로 인해 세부묘사가 생략되어 흐릿하다. 당대 시인이자 지식인이었던 샤를 보들레르가 1863년 선언한 ‘덧없고 순간적인 근대성’을 잘 보여주는 도시 풍경의 걸작이다.

 

"이 그림들에서는 기차의 굉음이 들리는 듯하고 증기가 거대한 역사를 뒤덮으며 뭉실뭉실 떠가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여기, 이 아름답고 널찍한 근대적 화폭들 안에 바로 오늘날의 그림이 담겨 있다. " – 에밀 졸라, <마르세유의 신호대>, 1877년 4월 19일 -

 

 

지베르니와 수련
파리와 베퇴유(Vétheuil)를 비롯한 여러 파리 근교를 오가며 활동을 하던 모네는 마침내 1883년 노르망디 지역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지베르니(Giverny)에 정착을 하였다. 그 사이 그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1878년 둘째 아들 미셸이 탄생하여 기쁨을 맛보지만 그 이듬해인 1879년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가 죽음을 맞이해 모네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그의 곁에는 경제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그를 지지해 주는 바지유, 마네와 같은 친구들이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또한 1880년대에 들어와 후원자 뒤랑 뤼엘의 적극적인 도움과 전시회들의 성공으로 인해 모네는 경제적인 안정이 찾아오게 된다. 이후 남은 반평생을 지베르니에서 정원을 가꾸며 살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의 마스코트와 같은 수많은 수련 작품이 탄생하였다.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미술관에서 우리는 모네의 수련을 만날 수 있지만 이곳 마르모탕 미술관에 가장 많은 작품이 전시가 되고 있다.

 

1897년 그려진 이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수련 그림엔 수평선이 없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물, 수중식물 그리고 물에 반영되는 하늘이 있을 뿐이다. 빛, 바람, 물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수면의 순간성은 이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영원성을 가진 아름다움으로 존재한다. 마르모탕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6개의 대형 작품의 파노라마 전시는 잊지 못할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루앙 대성당 연작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을 한 이후에도 프랑스 내 다른 지역과 런던, 북유럽 등을 다니며 작품 활동을 했는데 그중 프랑스 루앙에서 그린 대성당 연작이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1892년에서 94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대성당 맞은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30점에 달하는 연작을 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 맑은 날, 흐린 날,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성당의 모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 다시 말하면 빛이 대상의 본질임을 모네는 그림을 통해 증명해 내는 듯하다. 마르모탕 미술관에서 만나는 이 작품은 하루의 끝에 태양의 효과를 보여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성당 정면 파사드는 서쪽을 바라보기 때문에 해 질 녘 강렬한 태양이 성당을 비추고 있는 상황임을 이해할 수 있다.

 

햇살이 닿는 돌들은 분홍색, 베이지색, 노란색이 어우러져 마치 녹아 흐르는 듯한 모습으로, 이에 대비하여 아래쪽 그림자는 보라색과 파란색으로 표현된다. 대성당이 스토리를 가지는 작품의 목적이 아니라 회화적 표현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으며 그것을 연작이라는 작업을 통해 더욱 극대화하는 화가의 행위는 다가올 현대 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미리 예고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밤새워 악몽만 꾼 적도 있소. 대성당이 내 위로 무너져 내리는데, 아 그게 푸른색이며 분홍색, 아니면 노란색으로 보이지 뭐요."(1892년 4월 3일 알리스에게 보내는 모네의 편지 중)

 

 

 

노란색과 보라색 아이리스
1926년 12월 5일 인상주의의 대가 클로드 모네는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인해 시력을 거의 잃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작품 제작의 열정은 식지 않았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 상처받은 프랑스인들을 생각하며 제작한 인생 역작, 대 수련 파노라마는 지금도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마르모탕 미술관에서는 그가 세상을 뜨기 바로 전인 1924-25년 작, ‘노란색과 보라색 아이리스’를 만날 수 있다.

 

 

알록달록한 색의 조화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시점이 신선하다. 왠지 파란 하늘이 반갑다. 지베르니에서 그려진 많은 작품들을 보면 수련과 물 그리고 물에 비친 하늘이 그려지면서 화가의 시점은 주로 아래를 향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래에서 위로 하늘을 올려보는 시점이다. 죽기 전까지 모든 열정을 불태우며 물의 반영을 그리던 화가가 이제는 담담히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던 것일까? 아니면 이 땅에서 할 일을 다하고 이제 떠날 때가 왔음을 느끼며 하늘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앉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백발의 예술가를 떠올려보니 그의 위대함 앞에 필자의 고개는 숙여진다.

 

 

미술관을 나가며
백 년 전 지베르니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하던 모네는 자신의 예술이 후대에 지구촌 곳곳에서 이토록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작가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 상처받은 프랑스인들을 위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미술관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주니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모네 예술의 처음과 끝을 경험하는 마르모탕 미술관. 그의 예술은 오래전 끝이 났지만 그의 작품은 이토록 아름다운 공간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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