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켜 왔다. 동시에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다.
한 달여 전 이재명 대통령이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연명의료 중단과 관련해 인센티브 제공 방안을 고민해 보라고 지시했다는 보도는, 이 문제가 더이상 시행에 머물지 않고 정책의 영역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장관이 곧바로 부작용을 우려하며 신중한 입장을 밝힌 것 역시 이 사안의 무게를 말해준다.
우연인가, 대통령 언급 바로 1주 전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연명의료 결정 제도가 시행된 이후에도 연명의료 중단을 선택하는 비율은 크게 늘지 않았다. 이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정서적 요인과 무관하지 않다. 부모의 생명을 끝까지 붙들어 두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인식, 다시 말해 생존의 연장을 효도로 이해해 온 유교문화가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의 가르침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효를 그렇게 단순하게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공자와 자로의 대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자로가 효를 묻자, 공자는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효란 봉양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개나 말도 먹여 기를 수는 있다. 공경함이 없다면 무엇으로 효를 구별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생명을 붙들어 두는 행위 자체가 곧 효는 아니라는 뜻이다. 회복 가능성은 없고 고통만 이어지는 상황에서의 연명의료가 과연 공경에 해당하는지,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 설화 속에 전해 내려오는 고려장 이야기 또한 떠올려볼 만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는 문제와 가족 공동체의 삶과 죽음을 고민했던 선조들의 무의식을 담고 있다. 오늘날 의료기술이 생물학적 생존을 어느 정도 늘릴 수 있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이 훼손된다면 그것을 진정한 진보라 부르기는 어렵다.
연명의료 중단 권고를 비용 절감이나 의료 효율성의 문제로만 바라봐서도 곤란하다. 이는 한 개인의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인센티브 제공 논의 역시 금전적 유인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충분한 설명과 숙의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 주치의와의 신뢰에 기반한 반복 상담, 윤리 자문 체계의 정비와 함께,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한 환자와 가족이 돌봄의 공백 속에 놓이지 않도록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국가적 확충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그래야 연명의료 중단이 체념이 아닌 존엄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45년간 치과의사로서 환자들의 구강건강을 지켜오며 생명의 고귀함과 그 소멸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 왔다. 치과진료 역시 생명의 첫 통로를 다루는 의술이기에,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품격과 존엄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같이 체감한다. 더 이상 회복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의 연장이 되는 순간을 적지 않게 봐 왔다. 그때 의료인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에서 한 걸음 물러나, 존엄을 지키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명의료 중단 권고와 국민정서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마무리하는 일, 고종명(考終命) 또한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을 때, 이 문제 역시 조금씩 풀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연명의료, 현대판 병원고려장 과연 인간적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