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참 나쁜 영화라 생각했다. 잔인성이 영화의 창작성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묻혀버렸다. 차후에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게 하는 영화였다. 예상대로 그 이후로 뉴스에서 영화에 준하는 잔인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고, 최근엔 더욱 심각한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도 차마 다 듣지 못하고 채널을 돌렸다.
다른 채널을 돌리니 정부 장관 모 후보자의 딸이 의학지 논문에 제1저자가 된 사건이 집중 조명돼 나온다. 어쩌다 기초의학 학회지의 권위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고 권위가 에세이 정도로 취급받는 지경까지 추락했는지 안타깝다. 이런 논란 속에서도 제1저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밤을 실험실에서 날밤을 새웠을 연구자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실험실에서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실험하는 분들에 대한 미안함도 예의도 없다. 필자도 일본 유학시절 1년간 실험하고 작성한 논문을 싣지 못한 경험이 있다. 당시 조교수가 자신의 논문 결과와 다른 결과를 보인 논문이라고 같은 교실에서 상반된 내용을 투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결사반대해 논문이 사장된 적이 있었다. 1년 동안 토·일요일을 반납하고 매일 새벽 2시에 퇴근하며 수고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었던 필자이기에 이번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가정이 머리에 어른거린다.
우선 떠오르는 가정은 누군가 그 논문을 쓰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연구에 전념했는데 마무리 단계에서 제1저자가 바뀐 것이다. 가장 가슴 아픈 가정이고 이때는 그가 가장 큰 피해자다. 통상 교신저자인 교수는 논문을 지도만 하지 직접 쓰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정은 담당 교수가 자기가 예전에 써놓은 논문을 제1저자로 준 것이다. 이것이 피해자가 없는 가장 좋은 가정이지만, 논문 점수에 매년 시달리는 교수들이 논문을 써놓고 제출을 안 한다는 것이나 점수를 포기하고 남에게 그냥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신뢰도가 높지 않다. 세 번째 가정은 본인이 진짜로 실험하고 쓰는 것인데 병리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고등학생이 2주 만에 쓰는 것은 하버드에 수석 합격할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니 이 가정 역시 신뢰도가 높지 않다. 결국 여러 가지 가정 속에서 가장 합리적 의심이 가는 것은 연구원 누군가 논문을 다 쓴 상태에서 교수 강압에 의해(물론 자진 반납의 형태를 띠었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 제1저자를 포기하는 상황이다. 그 가정을 전제로 한다면 그 사람이 가장 큰 피해자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정치적이라서 그런 것은 이해하지만 가해자에게만 관심이 있고 피해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현실이 씁쓸하다.
그럼 그 교수는 왜 제1 저자를 고등학생에게 주었을까? 가장 쉬운 가정은 매매이다. 돈 받고 파는 것이다. 두 번째 가정은 TV에서 언급하는 품앗이 자식 간 교환이다. 세 번째 가정은 교수가 말한 대로 좋은 외국대학을 가라고 선의로 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대가가 없다는 부분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네 번째 가정은 영화에서처럼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러고 싶어서다. 하지만 이 또한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혹은 필자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을 수도 있다.
뉴스를 보는 동안 수많은 가정들이 스치며 채널을 돌렸다. 일본과의 외교 분쟁이 나온다. 채널을 다시 돌리니 홍콩사태가 나온다. 또 다른 곳에선 아마존 정글에 화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다시 채널을 돌리니 미국에 허리케인 도리안이 상륙한다. 우울한 내용들에 결국 TV를 껐다. 뉴스를 보는 것이 두려워지고 보면서 우울감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난 지 몇 달이 된듯하다.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와 뉴스를 끊고 사는 데에는 책이 최고다. 책장에 사마천사기, 중국인이야기, 로마인이야기가 눈에 띈다. 무엇을 택하든 모두 장편들이니 2개월은 생각 없이 살 수 있겠다. 즐거운 뉴스가 그립지만, 기다리느니 차라리 책을 읽는 것이 더 빠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