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2 남학생이 엄마와 함께 내원하였다. 중2 아들은 상담실에 들어오면서부터 의자에 앉을 때까지 심드렁한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영혼 없는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비딱하게 앉고는 시종일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주소를 물으니 엄마가 열심히 설명하였다. 치료는 발치 교정이 필요하고 심한 과개교합으로 치료 기간이 2년이 조금 더 걸릴 수 있다고 설명하고 나서 끝자락에 엄마에게 한 가지 질문하였다. 아들이 이제 곧 중3이 되고 교정이 2년 이상 걸리면 고1이 넘어서까지 장치를 붙이고 있어야 하는데 혹시 아들과 상의해 보았는지 물었다. 엄마는 누나가 중2 때 교정을 해서 아들도 지금 데리고 왔다고 답했다.
이에 “어머니, 여학생과 남학생은 다릅니다. 여학생은 자신이 원해서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수 있지만, 아들이 원하지 않을 때는 부모님의 강압적인 요구로 고등학교 시절에 교정장치를 붙이고 있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일단 아들과 상의하는 것이 먼저일 듯합니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한 번도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서 장치를 붙이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아들은 시종일관 영혼 없는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대화에 동참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아들이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의사를 표하지 않으면 지금 같은 사춘기 시기에 장기간 교정치료를 하는 것은 모두를 힘들게 할 수 있으니 본인 의사를 먼저 존중해주라고 말하고 끝났다.
모자가 돌아간 뒤 둘 다 안타깝게 보였다. 아들을 아직도 어린 아이로만 취급하는 엄마 모습과 자신은 치료받기 싫다고 직접 말은 못하고 끊임없이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아들 모습으로 상담실은 전투장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아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표현했지만(삐딱하게 앉고 말 한마디 안하고) 엄마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반항하는 모습이 대화의 또 다른 표현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어린 치기로 받아들이거나 원래 그렇다고 인식해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부모들은 아이 성장기 어느 시점에서 자식을 한 인격체로 보아주면서 앞에서 이끌어가는 태도가 아니라 뒤에서 조력하는 조력자로 변해야 한다. 즉 부모가 생각을 전환해야 할 시기다. 아이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변하는 데 반해 부모들은 ‘우리 아이’라는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인식하지 못하는 부모가 아니라 인식하는 자식 몫이 된다.
중2 아이가 입을 닫았을 때는 무슨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전혀 말을 안 한다는 것은 집안 분위기가 그럴 수 있다. 정상이라면 중2 아들은 불만이든지 투정을 부려야 하건만 한마디도 안 한다는 것은 뒤에 무서운 아버지가 존재하는 집안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무엇인가가 아들의 입을 막아 버렸고 아들은 말 대신 소극적인 행동으로 표현했다. 영혼 없는 표정과 비딱하게 앉아있는 등 온몸으로 처절하게 표현했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처절하게 표현하는 아들과 이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엄마 둘 다 안타까워 보였다.
아마도 엄마는 아들이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쟤는 원래 그래’라고 생각해버리기 쉽다. 혹은 아이라는 고정된 사고를 변화시키지 못해 성인이 된 뒤까지도 ‘아이’라 표현하는 부모들처럼 자식을 성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서 유치원 시절 때 부모가 했듯이 동일하게 자식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게 된다. 부모가 이렇듯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에 두 가지 형태로 자식들은 반응한다. 유선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것으로 성숙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두 번째는 그냥 거부 없이 수용해 부모의 영원한 아이로 남는 방법으로 성숙을 포기하고 안주해버리는 것이다. 영원한 마마보이가 되어버리는 안타까운 형태다.
청소년기란 아이들이 신체와 자아가 성숙해가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을 절대적으로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때를 지나면 익숙해져서 되돌리기 어렵다. 부모는 말하지 않는 아이들의 말을 알아듣는 눈이 필요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