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두 가지 사건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아동학대와 학생폭력(학폭)이다.
아동학대는 학대를 넘어 살인까지 이어지고, 어린이집에서는 급식에 먹지 못할 것을 넣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차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아이를 가방에 넣고 누르고, 조카가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이모가 물고문하고, 아기가 운다고 아빠가 던지고, 엄마가 전남편이 밉다고 자기 아이를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가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로 유아들이 사망하였다.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자식을 구하던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되었는가. 트로트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가사처럼 굶던 시절에 아이에게 먹이고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던 어머니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불과 60년도 안된 사이에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한편, 학폭은 배구 쌍둥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투를 연상시키며 스포츠계에 만연된 것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두 종류 사건은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힘 있는 가해자가 힘 없는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한 면에서 같다. 가해자가 나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필자도 동의하지만, 60년 전에 존재할 수 없었던 사건들이 현재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회가 가해자들이 배출되는 것을 막는 순기능을 하지 못한 면에서 가해자들 또한 피해자다. 장발장이 도둑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라면, 장발장을 단순히 비난하기 어렵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에서조차 학폭은 늘 존재했다. 그런데 왜 과거보다 지금에 더 문제가 되고 사회 이슈가 되고 있을까. 우선 이 두 사건의 가해자 연령대가 대략 20~30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세대는 학교 교육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서 교육을 받았다. 즉 정상적인 사회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교와 선생님은 학폭을 책임지고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결국 방치됐거나 방관됐던 학폭은 곪고 곪다 이제 사회문제로 발전되어 튀어나오는 것이다.
학폭은 학교와 선생님의 권위로 현장에서 해결되고 끝나야 할 교육의 한 과정이었다. 그런 면에서 학교 교육 붕괴의 1차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학폭을 당한 피해자이고, 가해자는 2차 피해자이고, 그들이 같이 사는 사회가 3차 피해자다.
아동학대도 마찬가지다. 가해자인 20~30대는 교육이 붕괴된 학교에서 인성을 배우지 못하였고, 형제와 자매가 없이 외톨이인 가정에서 아기가 인형이 아니라는 사실과 아기는 웃는 시간보다 우는 시간이 많다는 현실을 보지 못하였다. 동생의 기저귀를 갈면서 배워야 했던 삶의 기본지식을 건너뛰고 얻는 아기는 TV와 사진에서 보던 낭만이 아니었고 울기만 하는 악몽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어미 동물이 새끼가 독립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과정이 생략된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그들 또한 가해자지만 피해자다. 20~30년 전부터 시작된 인성교육이 배제된 입시 위주 교육과 학생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선생님의 권위를 추락시킨 대가를 이제 사회가 받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법은 처벌은 하지만 사건을 막을 수는 없다.
인성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 이유다. 엄마의 구두가 학교 교실로 들어가서 선생님 멱살을 잡은 뒤부터 이미 예견된 일들이었다. 학교 교육에도 밥상머리 가정교육에도 인성교육이 사라지면서 발생한 문제들이다. 이와 유사한 인성 결핍에 의한 사건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듯하여 안타깝다. 학폭 또한 학교와 선생님이 현장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런 힘을 그들에게 주지 않은 현실에서 사회 전체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슬픈 일은 반복될 것이기에 안타깝다.
학생 인권보다 선생님의 권위가 우위에 있는 것이 조금 덜 나쁜 선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학을 나와도 모두가 백수라는 지금이 슬프지만 입시 일변도 교육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학교는 다시 인성을 교육하고, 선생님에게 권위를 돌려주고, 사회는 교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아이들 교육이 그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