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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야기

빈 종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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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 이야기(537)
최용현 대한심신치의학회 부회장

아주 사소한 즐거움이 몇 개 있다. 문방구에 가서 이런저런 필기구나 학용품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철물점 공구코너에서 여러 가지 공구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책상 앞에 앉아 24가지 색연필을 보고 있으면 그냥 즐겁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A4용지 백지나 하얀 여백만 있는 도화지를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열고 빈 여백을 마주하면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칼럼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빈 여백 모니터를 접하면 늘 두 가지 감정이 충돌한다. 우선 백지 여백은 무엇이든 적을 수 있고 어떤 것이든 그릴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주기 때문인지 기대감을 품은 잔잔한 기쁨과 편안함이 있다. 반면,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주제를 정하고 글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강박적인 긴장감이 생긴다. 빈 여백의 백지를 마주하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면 두 감정이 가장 강하게 충돌한다. 처음 제목을 정하면 두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결론을 등대 삼아 글이 전개된다. 오늘도 빈 여백을 마주하고 두 감정에 휩싸이다가 문득 백지 여백이 주는 즐거움을 주제로 잡았다.

 

생각해보면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초보시절에는 무엇을 그릴까를 고민하고 화폭에 무엇인가를 많이 채우려고 노력한다. 반면 연륜이 쌓일수록 무엇을 뺄 것인가를 고민한다. 고수 경지에 도달하면 그리지 않아도 그려진 듯이 표현된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예전에는 필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또 많은 지식을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늘 지면이 부족해 무슨 내용을 빼야 할지를 고민했다. 반면 이제 10여년 글을 써보니 사소한 깨달음이 있었다. 늘 필자 생각이 옳은 것도 아니고 구글만 검색해도 무한정 나타나는 지식을 굳이 필자가 활자로 전달하는 것은 독자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란 생각에서 최근엔 몇 가지 중요한 팩트를 제외한 검색 가능한 지식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고 있다.

 

글이든 그림이든 반드시 그려야 한다는 의무적 강박 없이 빈 종이를 마주하는 것은 첫눈을 보는 것처럼 매우 즐거운 일이다. 24색 색연필과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하얀 백지 A4용지를 책상 앞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 시절 동심으로 돌아간다. 하얀 종이는 아무런 사심도 없는 동심의 아이들을 마주한 느낌이다. 그냥 그 느낌이 좋다. 그러나 빈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거나 그리기 시작하면 분별이 생긴다. 한 글자를 타이핑하는 순간 마치 올림픽 육상 선수가 첫발을 던지듯이 시작된다. 시작이 되면 끝날 때까지 진행해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의무감도 생긴다. 게다가 끝이 나면 결과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시작은 끝을 전제하고 끝은 시작을 완성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서 시작하지 않는 상태가 늘 설렘과 희망과 꿈이 있어 좋은가 보다. 또 ‘비어 있음’ 그 자체가 즐거움을 준다. 마음은 빈 종이처럼 비어 있으면 잔잔한 행복이 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잡다한 생각이 없으면 잔잔함 속에 평안한 즐거움이 있다. 복잡한 일거리가 생각의 끝자락을 잡고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집중되지 않고 마음은 늘 그 생각에 편해지지 않는다. 그 일이 욕심과 연관될수록 더욱 강하게 유착되어 생각이 비워지지 않는다. 불가에서 마음을 비우라는 말도 결국은 마음을 지배하는 생각을 줄이면 행복해진다는 의미이다. 성경에 심령이 가난한 자 또한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 생각들이 없어질 때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무심히 멀리 보는 들녘에서 얻는 평안함 또한 채우지 않은 비어 있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다. 번잡함이 없는 편안함이다. 마음이 늘 빈 종이처럼, 저녁 들녘 풍경처럼 평안하면 좋겠지만 일상은 언제나 번잡하고 잡다한 생각으로 복잡하다.

 

이제 이 글을 끝내야 하는 마지막 두 칸의 여백이 남았다. 마지막을 무슨 글로 끝내야 할까? 오늘은 퇴근길에 문방구에 들러 형광펜 하나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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