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 모 아파트에서 20대와 30대 남녀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변함없을 미래에 희망이 없어서 떠난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소식을 접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미래 희망을 잃고 사라져간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과연 그들이 잃어버린 미래의 희망이란 무엇이었을까?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태어난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미래 희망이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자주독립이 희망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으며, 군사정권시절에는 자유민주 정부가 희망이었다. 현시대에서 그들이 포기한 미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결혼하던 80년대에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반지하든 단칸방이든 같이만 있을 수 있으면 좋았다. 얼마 전 TV에서 30대 출연자가 최소한 아파트가 아니면 결혼해서 고생할 의미가 없다고 했다. 필자 세대가 어릴 때는 TV가 마을에 한두 집이나 있을 정도였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던 세대다 보니 없는 것에 익숙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2030세대는 없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경제적으로 모두 어렵게 살았던 필자 세대는 체념에 익숙한 반면, 모든 것이 풍요롭던 그들은 포기가 힘든 탓이다. 요즘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젊은 세대에게 하면 바로 ‘라떼아재’가 된다.
미래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데 필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 미래의 희망이 욕망과 욕심과는 구분돼야 한다. 행복과 희망의 가치 기준을 모조리 경제적 기준으로 돈에 맞춰버리면 영원히 얻을 수 없게 된다. 삶에서 돈이란 중요한 요소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절대빈곤은 사라졌다. 노력하면 먹고 사는 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자인 삶을 원한다면 쉽지 않은 사회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부자가 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회간접자본과 안전망이 구축될수록 큰돈을 버는 것은 어려워지기 때문이며, 그런 안전한 사회 속에서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개인적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선진국적인 삶의 형태다.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일반인들은 반드시 한번은 어느 날인가 큰집과 큰돈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희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망과 욕심이 큰 것이었고 현실감각이 없었던 것이며 착각 속에 살았던 것이다.
지금 시대에 희망이란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는 것이며, 행복 또한 많이 가져서가 아니고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것을 그들이 어린 나이에 알기 어렵다. 미래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단순히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정부가 은행의 무한정 대출을 막았다면, 전세금이 오를 수 없었고 아파트값도 이렇게 미친 듯이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치인들이 미래 몰락을 알고도 당장 자신들의 표를 위하여 ‘표(票)플리즘’으로 경험이 적은 젊은 세대를 빚이라는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제 빚의 주체인 연준이 금리를 올리자 많은 젊은이들이 빚의 수렁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연준은 계속 금리를 올릴 것이라 공표하였다. 환율은 1,430원을 넘었고 주식은 2,200이 무너졌다. 일확천금을 노렸거나 혹은 남들이 하는데 안하면 뒤처진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거나 이제 영끌족들이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한 일에 책임져야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금융과 정치세력들의 책임이 더 크다. 그들은 이렇게 될 것을 예측하고도 가계부채가 위험하다는 말만 하고 표 때문에 무한정 전세대출과 아파트 구입 자금을 풀었다. 이제 그 대가를 고스란히 젊은 세대가 받아야 하는 시절이 왔다.
빚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는 어렵다. 영끌족이 절망에서 벗어나 최소한 견딜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들이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해주어야 견딜 수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도 희망을 지녔고, 전쟁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제 그런 진정한 희망이 필요할 때다. 그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이고 희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