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으로부터 받은 문자 중에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라는 글을 보았을 때 지금 치과의사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SNS에서 초저가 임플란트 광고가 부쩍 증가했다. 말로만 듣다가 처음 광고를 보았을 땐 참담함을 넘어 허탈한 느낌을 받았다. 필자가 교정의라서 평생 임플란트를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이유가 없어 관계없는 사건일 수도 있지만,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그것을 취급하는 직업의 가치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0원짜리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과 10만원짜리 케이크를 파는 백화점 점포에서 주는 이미지가 다르다. 도로 위 자동차가 최근 들어 절반 정도가 외제차인 시대에 300만원 임플란트를 취급하던 시절의 치과의사와 30만원대 치과의사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는 다르다. 외제차를 선호하는 심리를 지닌 고객 눈에 분명히 달리 보인다.
모든 환자가 싼 가격 치과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최저가가 등장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환자가 치과의사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못 참는 것은 비싼 가격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싼 것을 비싸게 구입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다. 바가지를 당했단 기분을 참지 못한다. 고객은 객관적으로 가치가 증명될 수 있는 것에는 얼마든지 돈을 지불한다. 수천만원이 넘는 명품백을 구입하기위해 줄을 서는 이유다. 만약 치과에서 행하는 기술들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다면 그리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치과의사가 심은 임플란트는 30년 안에 탈락하거나 문제 생기는 일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의료행위의 불확실성이란 특징과 위반된다. 의료행위에는 반드시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이 있다. 비록 경험이 많으면 부작용을 줄일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불확실성을 가진 기술 가치에 환자가 비용을 지불하는 상황에서 초저가 등장은 기존 수가에 대한 강한 의심을 유발시킨다.
심지어 이미 지불했던 금액에 대한 불만과 의심도 발생할 수 있다. 기존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환자로부터도 바가지를 씌웠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점진적이며 지속적으로 치과의사 격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30년 동안 아파트 가격은 엄청나게 올랐지만 거의 변하지 않은 스케일링 수가만큼 상대적으로 치과의사 가치가 하락해 왔다. 예전엔 국가가 의도적으로 치과 수가를 낮추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은 치과의사 스스로 낮추고 있다.
천원짜리 변호사는 수임료가 아니고 봉사다. 30만원대 임플란트가 수가가 아니고 의료봉사라면 문제 되지 않는다. 타인으로부터 칭송받고 스스로도 자랑스럽고 뿌듯할 것이다. 직업이 단순히 돈만 벌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지 못한다면 대통령이나 대기업 사장이 되어도 불행하다.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가 집단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다.
직업이 단순히 돈을 버는 목적이라면 태어나면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온 이들을 이길 수 없다. 치과의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이미 빌딩 지분을 지닌 자들을 넘어설 수 없다. 치과의사가 돈으로 승부하려는 순간 사회적으로 이미 루저가 된다. 넘을 수 없는 수많은 산이 생긴다. 치과의사는 장사꾼이 아닌 의료인으로서의 품위와 자긍심을 지닐 때 비로소 자존감이 생긴다. 필자가 공보의를 마칠 즈음에 남산 타워에 올랐었다. 창밖에 수많은 건물을 보면서 평생 치과의사를 해도 그중에 한 건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 전문가의 길을 선택했다.
똑같이 생긴 나뭇잎이 없듯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각자가 처한 환경이 모두 다르다. 치과의사면허는 객관화됐지만 진료행위는 객관적 평가가 어렵다. 환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치과의사는 스스로 평가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유일한 만족이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 직업윤리를 포기하면 언젠가는 마음이 어려운 상황을 만난다. 나무가 죽으면 아무리 작은 열매도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