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의 유명한 소설 ‘어린 왕자’ 중에는 많은 질문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에 대한 질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기적이란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과연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은 그 순간 자신이 겪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할 것이다. 밖에서 보는 어려움과 직접 경험하는 어려움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런 어려움도 그 사람의 과거 경험과 내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일반인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가장 잘 아는 이유다. 그런데 생텍쥐페리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타인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 말한다. 이런 차이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이상적인 어려움의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는 의미에서는 현실이든 이상이든 매한가지이다. 정신이 고통스럽든 육체가 고통스럽든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인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속에서 필자에게 한 가지를 선택하라한다면 ‘용서’다. 세상 모든 일의 중심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 정해진다. 미국 어떤 보고서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모두가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렇듯이 한 개개인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항상 내가 옳은 것이고 타인이 그르다. 타인과 반목이 발생하면 타협을 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이권이 걸려있으면 더욱 어렵다. 해결을 위하여 고전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고 충고하여 준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상대방 생각으로 중심축을 옮겨 생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나마 쉬운 것은 생각의 중심축을 옮기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다. 용서는 중심이 자신에게 있으며 상대보다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서를 위해서는 미움을 접어야 한다. 미움이라는 커다란 강을 건너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용서를 넘어 사랑으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용서’하거나 미워하지 않기만도 벅찬 경우가 많다.
요즘 치과계의 화두는 ‘불화’다. 불화를 화합하여야 한다는 소리들이 들린다. 화합은 그냥 마주 앉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이해와 용서를 동반하지 않은 화합은 모래성과 같이 쉽게 무너질 것이다. 이해와 용서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온 시간 속에서 생겨나고 자라온 미움이라는 커다란 강을 건너야 한다. 이것은 개인이나 단체나 마찬가지다. 불화와 대립은 다르다. 불화는 감정이고 대립은 이성이다. 이성적 대립은 정과 반을 통하여 합을 이루며 발전할 수 있다. 반면 불화는 감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이성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대립은 시간의 경과와 사건의 전개라는 순서의 과정을 겪지만, 불화는 감정에 기초를 두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여 오래 지속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한 번에 개선되고 바뀔 수도 있다. 불화는 미움의 발단을 이해하고 상대의 무례를 용서하면 해결될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통하여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을 기적이라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기적이라면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일반인에게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만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용서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옳은 일이라면 한 걸음이라도 가는 것이 용기이고 정의이고 그 시작이 용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