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는 늙은이 수염 밑에서도 그어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을비는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가 아니고 노인 수염같이 엉성하여도 비를 피할 만큼 적게 내리고 일찍 그친다는 말이다. 가을비는 천둥과 번개가 없다. 여름비처럼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이 겹치면서 내리는 비가 아니고 난층운에서 넓은 범위에 뿌리면서 내리기 때문에 부슬비 형태이다.
그런데 요즘 가을비는 좀 수상하다. 여름비 형태로 내리고 요즘은 늦은 장마와 같이 흐린 날씨를 지속하고, 급기야 오늘은 태풍의 영향으로 흐리기까지 하다. 가을 하늘은 천고마비라고 할 만큼 맑고 투명한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요즘 날씨는 비가 오고 흐리다. 거기에 무더위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습기와 늦더위는 습도를 높인다. 이런 가을비는 많은 곳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선 농사에 좋지 않다. 벼가 마르면서 품질이 확보되어야 하는 상황에 비가 오게 되면 볏단이 썩거나 알곡의 품질이 많이 떨어져서 밥맛에 문제를 준다. 밭에 심은 배추나 무의 경우에 수분함량이 높아지고 광합성 량이 적어져서 맛이 떨어지게 된다. 더불어 병충해의 우려도 높아진다. 과일의 경우에도 볕의 양이 줄어들어서 당도가 떨어지며 품질이 저하된다.
이런 가을비는 사람의 마음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여름에 한창이었던 더위와 장마에 지친 몸과 마음은 청량한 가을 기운과 맑은 하늘로 치유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요즘은 아직도 서울의 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도록 더위가 남아있고, 가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내린다. 하늘은 마치 장마철처럼 흐린 날이 지속된다. 결국 이런 현상은 습도를 높이고 불쾌지수를 높인다. 청량하여야 할 시기에 반대로 불쾌지수가 올라가니 그 정도는 배가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올해는 유난히도 더웠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고 흐린 날씨에 가을비까지 강하게 내려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요즘 가을비의 의미는 ‘우울’이다. 근래 외래에 내원하는 환자들이 예민해져있고 쉽게 짜증내는 것을 목격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해 보인다. 이는 마치 영국과 같은 유럽성 기후지역을 처음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이 초기에 대부분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과 유사하다. 어쩌면 요즘의 극단적인 정치상황이나 비윤리적인 사회상도 이런 기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런 시기에는 두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만나는 사람들이 우울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사소한 일에도 감정적인 분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조심하여야 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 직장 동료, 친구 등등에서 우울증의 징후를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여야 한다. 즉 예민하게 반응할 사건을 피하고 공격적인 반응에 직접적인 대응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병원 외래에서 만나는 환자들도 우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좀 더 세심한 관찰이 요구된다. 두 번째는 본인 스스로 우울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첫 번째 해결책은 쉬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과감하게 휴식시간을 늘려 육체적인 피로를 줄여야 한다. 다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를 늘려야 한다. 셋째로 사람을 통하여 위안을 받으려는 노력은 조금 자제하여야 한다. 타인의 마음상태에 따라 영향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넷째는 본인이 스스로 우울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스스로 극복할 정도라면 긍정적인 생각이나 행동, 여행이나 운동, 독서나 종교 생활 등으로 변화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면 카운슬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까이에 멘토가 있다면 만나서 조언을 받고 없다면 심리상담사를 찾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는 유난히 무더웠고 가을 중반인 아직도 그 더위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여름비 같은 가을비에 태풍까지 겹쳐서 습도를 높이고 불쾌지수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때 우울하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몸과 마음에 여유를 지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