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에서 금성까지 거리가 1억㎞, 화성까지가 2억3,000만㎞니까 화성에서 금성까지는 대략 1억3,000만㎞가 된다. 초등학교 때 암기하던 식으로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라고 하면, 마지막인 명왕성까지의 거리가 60억㎞가 되니 화성-금성간 거리는 우주에서 보면 티끌만한 정도다.
인간관계를 연구하던 존 그레이(John Gray)는 1992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으로 일약 대스타가 됐다. 전 세계 4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한국에서도 연애서의 바이블처럼 여겨졌다.
내용은 간단하다. 여성은 대화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기 때문에 남성은 그저 잘 들어주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라는 것, 반대로 남성은 혼자서 삭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성은 그걸 이해하고 바가지 긁지 말라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남녀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 존중하라는 말이고, 더 포괄적으로 보면 사람은 바뀌지 않으니 바꾸려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고 이해하라는 메시지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다 보면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화성에서 온 환자는 심한 치아 동요도의 치주질환을 가진 치아부위에 치주치료나 발치는 꺼리고 단순 처방만을 받고 싶어 하지만, 금성에서 온 의사는 단순 처방으로는 해결이 될 수 없음을 설명하며 가급적이면 처방을 꺼린다.
그렇다고 환자가 처방전을 받아들고 병원을 나서지 않을까? 환자는 결국 화성에 가서 치주치료나 발치가 아닌 단순 처방 화성인 의사를 찾게 되고 진료실 체어에 앉아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는 금성인 의사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소통(communication)과 융합(convergence), 그리고 통섭(consilience).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세 단어가 앞으로 모든 학문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텐데 특히 환자에 대한 전인적인 평가보다는 기관별로 연구를 하는 서양의학의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의료분야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소통과 통섭은 물리적인 섞임이 아니라 화학적인 결합을 필요로 한다. 물리적인 섞임은 언제나 분열의 위험이 있다. 화성과 금성의 거리도 물리적으로만 따지면 절대 가까워질 수 없지 않은가.
의사와 환자의 거리도 화학적 거리, 또는 감정적 거리로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환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공감을 해보면 어떨까. 공감하기는 장소가 어디든지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지금 당장, 어떤 환자에게라도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공감을 할 수는 없다. 환자가 한 명 올 때마다 내가 한 번씩 아프다면 아무도 견뎌낼 수 없다. 올바른 진단과 처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시도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공감하기는 나쁘게 보면 ‘감정노동’이라는 업무가 추가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정노동’ 대신 헨리 나우웬의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를 떠올리고 싶다. 종교적인 색채를 빼더라도 ‘상처받은 치유자’는 모든 의사들에게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