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세종은 조정대신들에게 뇌물을 주고받는 자를 처벌하는 뇌물금지법을 만들라는 어명을 내렸다. 받은 자만 처벌하던 것에서 공여자까지 처벌하겠다는 의도였다. 2015년에 시행된 김영란법의 원조였다. 사실 조선시대는 뇌물공화국이었다. 아전은 월급이 없었고 관직은 삼정승과 판서들 주청으로 이뤄지다 보니 수령과 관찰사들은 뇌물을 받고 올리는 순환구조였다. 뇌물은 국가재정을 악화시켰다. 이런 부패를 약화시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할 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세종에서 세조 때까지 재정 수입이 가장 좋았다. 이 법을 만든 세종은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을 만나고 판결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세종은 끝까지 파헤치지 않고 늘 흐지부지하게 끝냈다. 증거보다 진술에 의존하던 당시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무고한 사람이 만들어지고 힘없는 자가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세종은 뇌물방지법을 강하게 쓰고 싶었지만 힘없는 자가 더 많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세종은 재정수입을 증가시키고 공직자에게 적당한 경종을 주려는 목적만 달성하고 힘없이 억울한 무고한 자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으려 법 집행을 강하게 하지 않았다. 중국을
올해는 4월 4일이 청명이다. 하늘이 맑아진다고 하여 ‘청명’이라 하였는데 요즘은 황사와 미세먼지로 그 이름이 무색하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멀리 롯데타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악의 황사가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다행히 이틀 전에 내린 비로 조금은 맑은 편이다. 청명은 한식과 같거나 하루 차이가 난다. 한식은 식목일이기도 하다. 그럼 청명과 한식은 무엇이 다를까?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로 태양 위치를 기준으로 한다. 태양 횡경이 15도일 때이다. 반면 한식(寒食)은 동지를 기준으로 105일째 되는 날로 통상 양력 4월 5일 경이다. 청명은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한식은 지난해 사용해온 불씨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불씨를 집히는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날은 밥을 하지 않아 찬밥을 먹는 날이다. 청명엔 봄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논 밭둑을 손질하는 가래질을 품앗이로 하는 등 행동을 하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시대 한식에는 임금이 불을 나누어주는 사화(賜火)를 하였다.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로운 불꽃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이 불을 문무백관에게 내리고 이것은 다시 각 고을 수령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듯 새롭게 시작하는 철학적
불행이란 사전적으로 ‘행복하지 않음’이다. 즉 행복이 기준이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처럼 행복은 충분한 만족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욕심이 무한하여 충분한 만족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행복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에 따라 좀 더 많고 높은 것을 요구하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며 미래적이다. 반면 불행은 현실이다. 누군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생각이 필요하지만, 불행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답변이 나온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행복하지 않음’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행의 반대는 욕망을 기반으로 한 추상적인 행복이 아니고 현실을 기반으로 한 ‘불행하지 않음’이다. 행복은 이루기 어렵지만, 불행을 전제로 한 ‘불행하지 않음’은 이루기 쉽다. 과거 후진국이나 개도국 때는 물자와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좋고 나쁨이 아니라 구하기 어려웠다. 반면 지금은 물자와 먹을 것의 절대량이 넘친다. 과거에는 없어서 불행했다면 지금은 더 좋은 것을 소유하지 못해 불행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행하지 않음’은 조금 노력하면 얻을 수
용서(容恕)는 한자어이며 국어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보면 행위에 대한 설명이고 행위를 하는 주체자의 생각이나 마음에 대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한자 ‘容恕’를 풀어서 보면 ‘容’은 외적으로는 얼굴이나 용모를 의미하고 내적으로는 속내 혹은 속에 든 것을 의미한다. ‘恕’는 如(한결같음)와 心(마음)으로 구성되어있다. 한결같은 마음이 ‘용서할 서(恕)’이다. 즉 상대를 보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한다. 특히 如(한결같음)는 공(空)과 같이 일체 동요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여(如如)가 부처의 마음 상태이고 경지를 의미한다. 진정한 용서란 국어사전적인 행동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한자 뜻이 의미하는 내면적인 마음에서 상대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무심한 경지에 들었을 때가 진정한 용서다. 즉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다고 용서가 된 것이 아니다. 영어로 forgiveness 역시 for(멀리)와 give(주다)로 ‘마음 밖에 내 보내다’ 즉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자 의미와 유사하다. 상대를 보고 마음에서 분노든 미움이든 억울함이든 어떤 동요도 일어나
전북 정읍의 천년 고찰 내장사의 대웅전이 전소됐다는 뉴스는 매우 안타까웠지만, 53세 사미(예비승려)의 소행이란 소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동안 우려했던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화재사건은 예비승려에 의한 방화라는 종교적 범죄의 의미가 아니라 수 천 년을 이어온 전통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어 무너지며 나타난 파열음이며 사회적 경고다. 그간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스승과 제자 관계인 도제식 교육제도가 변질되고 전통이 파괴되어 온 지 오래되었다. 도제식 교육 중에 가장 오래된 곳이 불교 승려제도였다. 전통적으로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군대보다 어렵다는 행자 생활을 마치고, 예비승려 생활을 모두 겪고 나서 비로소 정식 승려가 되었다. 한 명의 스님이 되기까지 스승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하고 책임지는 전형적인 도제였고, 수행하는 내내 성취도를 늘 확인받고 인가받는 작업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출가자 수가 감소하면서 13~50세만 출가가 가능했던 연령 제한을 2017년부터 65세까지 확대했다. 도제식 교육에서 승가대학 같은 시스템 교육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때 이미 스님들 자질 검증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예비승려가 대웅전
KTX에서 94년생 여성이 반복되는 저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라고 말하며 햄버거를 먹은 사건이 화제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마스크 쓰기도 거부하고 큰 소리로 전화를 걸며 요청을 거부했다. 이 기사를 보며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과연 그녀의 아빠가 누굴까. 20대 여성이 공공장소인 KTX에서 규정을 어기고, 저지하는 이에게 반감을 갖고, 유치원생 정도의 말을 던진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 아빠는 어떤 생각일까.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라는 말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있다. ‘나는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가진 아빠의 딸이기 때문에 특권이 있다’, ‘나는 법을 지키지 않아도 언제든지 빠져나올 유능한 변호사가 많아서 법 위에 있다’, ‘나는 아빠의 돈과 힘으로 너에게 얼마든지 위해를 가할 수 있으니 알아서 기어라’이다. 7~80년대 군사정권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2021년인 지금 과연 그런 특수한 권력을 뒤에서는 모르지만 대놓고 누릴 수 있는 자가 누굴까? 대통령이나 장관 등 고위직과 선출직은 한 번에 훅 간다. 예전에 경기도지사가 “나 경기도지사에요”라고 말하고 그 이후로 사라졌다. 재벌들
요즘 발생하는 사건 사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마디로 정리된다. 돈과 인성이다. 동양사상은 삶을 두 가지 축으로 본다. 돈과 명예다. 명예를 추구하는 시대와 돈을 추구하는 시대가 순환한다. ‘폼생폼사 ;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던 시대가 ‘명예의 시대’였다. ‘냉수 먹고도 이를 쑤신다’는 속담의 시대다. 어찌 보면 허세로 보이지만 도덕과 양심이 지배하는 정신이 건강한 사회이기도 하다. 돈(재;財)의 시대는 모든 것에서 돈이 우선한다. 돈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순기능을 하면 재생관(財生官)으로 명예를 살린다. 예를 들면 학자금은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킨다. 남을 돕는데 사용된 돈은 자신의 명예를 높인다. 반면 돈을 벌기 위해 인성을 버리면 역기능이다. 즉, 돈(재:財)이 인성을 극하는 것으로 재극인(財剋印)이다. 인성이 무너지면 명예가 실추된다. 이런 돈의 시대와 인성의 시대는 순환을 하며, 지금은 ‘돈의 시대’다. 돈의 시대는 인성이 무너진 때이다. 돈의 가치가 인성의 가치보다 높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의 내면을 보면, 돈 아니면 무너진 인성 때문이다. 후안무치한 정치인이나 관료, 아동학대, 학폭, 성폭력, 사악한 드라마 등은 인성이 무
최근 들어 두 가지 사건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아동학대와 학생폭력(학폭)이다. 아동학대는 학대를 넘어 살인까지 이어지고, 어린이집에서는 급식에 먹지 못할 것을 넣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차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아이를 가방에 넣고 누르고, 조카가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이모가 물고문하고, 아기가 운다고 아빠가 던지고, 엄마가 전남편이 밉다고 자기 아이를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가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로 유아들이 사망하였다.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자식을 구하던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되었는가. 트로트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가사처럼 굶던 시절에 아이에게 먹이고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던 어머니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불과 60년도 안된 사이에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한편, 학폭은 배구 쌍둥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투를 연상시키며 스포츠계에 만연된 것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두 종류 사건은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힘 있는 가해자가 힘 없는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한 면에서 같다. 가해자가 나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필자도 동의하지만, 60년 전에 존
미얀마에서 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아웅산 수지가 구금되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녀는 민주투사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음에도 정권을 잡고 소수인종을 탄압하여 비난을 받던 인물이다. 그녀가 변할 것과 변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부분이 아쉽다. 영국 속담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모 개그맨은 ‘일찍 일어나는 새는 피곤하다’고 빗대어 말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저자 쉘 실버스타인은 「일찍 일어나는 새」라는 시에서 벌레의 입장을 말했다. “만일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 이 시는 통찰을 이야기한다. 새와 벌레란 신분이 아닌 상황에 대한 통찰이다. 벌레를 먹는 새는 작은 새이다. 벌레를 먹지 않는 큰 새를 만나면 작은 새가 벌레 입장이 된다. 이 속담은 ‘그러나 큰 새에게 빨리 잡힐 수도 있다’는 다음 문구가 빠져 있다. 이 속담은 게으르지 말라는 교훈을 담았다. 우리나라 속담엔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고 하였다. 이 두 속담의 차이는 유효기간이 다르다. 우리 속담은 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효력을 상실한다. 통찰이다. 교훈
춤이나 운동이나 몸을 사용하는 것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중심 잡기이다. 모든 춤은 단전을 잡아당겨 힘을 모으며 시작된다. 단전이 춤의 코어가 되어 어떤 동작도 컨트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이나 성악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첫걸음을 걷기 위하여 수만 번 넘어지는 것도 중심잡기를 터득하기 위한 과정이다. 몸뿐만이 아니다. 사상, 철학, 마음, 생각, 인간관계와 같은 모든 것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처음 시작이다. 하지만 오래 시간이 지나거나 초심을 잃거나 생각 없이 살다보면 중심을 잃고 대세에 휩싸이는 경우가 생긴다. 요즘 시대는 중심잡고 살기에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다. 매일 새로 발생한 코로나 감염자 수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건물의 출입구에서 체온측정을 해야 한다. 치과에서도 내원하는 모든 사람을 체온측정하고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모두가 잠정적 보균자로 의심받는 상황이다. 뉴스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드라마는 경쟁적으로 사악해졌다. 부동산과 주식은 광기로 끝이 없을 것처럼 오르고,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빚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런 시대 환경 속에서 스스로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럴 때 필자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미분과
치과에 출근하던 원장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30대 남성에게 폭행을 당하는 영상을 보면서 참담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가해자 문제인가? 치과의사 문제인가? 치과계 문제인가? 사회문제인가? 확실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요소가 만나서 발생하게 된다. 한 가지 현상이 반복해서 나타날 때는 우연보다는 필연적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높다. 즉 동일조건이 되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건의 원인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늘 사회 환경, 가해자, 피해자인 3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현시점에서 나타나는 거시적인 사회 환경을 보아야 한다. 표창장 위조 사건을 시작으로 사회 자체가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가 흔들렸다. 벼룩을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웠다. 최근엔 정인이 사건을 포함해 아동학대에 의한 사망 사건이 증가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외부출입이 적어지고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스트레스를 약한 자에게 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가정폭력이나 이혼이 급증할 가능성도 높다. 정부가 코로나로 인해 양적완화정
이 글로 심리학 이야기를 쓴 지 500회째다. 처음 시작할 때 3개월 정도 예상하고 시작한 것이 어느덧 500회가 되었다. 기간으로 10년이 넘은 듯하다. 글 한 편을 쓰는 데 3시간 정도 잡으면 1,500시간 정도다. 대략 62일을 꼬박 글을 쓴 셈이 된다. 처음부터 10년을 쓰라고 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세상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그냥 한 주, 한 주를 쓰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조금씩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깨닫게 한다. 인도에서 누군가 삽 하나로 오랜 세월을 행하여 산을 가로지르는 통학 길을 만들었다. ‘멈추지 않으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을 새삼 다시 생각해본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에는 마감을 맞추고 주제를 생각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주 수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주제는 평소 생활을 하며 문득 떠오르는 때에 스마트폰에 적어 놓는다. 필자가 갤쫛시노트를 쓰는 유일한 이유다. 500회를 맞이하여 그동안 애정을 갖고 읽어주시고 피드백해 주신 독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문자를 주시기도 하고, 전화를 주
70대 환자분이 내원하셨다. 집 근처 치과에서 임플란트를 한 다음 날부터 걸을 때 다리도 아프고 씹는 것도 이상하고 불편한 느낌인데, 치료해준 의사는 이상이 없다는 말만 한다고 불평하셨다. 교합과 유도로 등을 확인했지만 특별한 문제점이 없었다. 단, 턱기능을 검진하는 동안에 대답을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힘을 주고 입을 벌리고 닫는데도 턱이 덜덜 떨리는 양상이었다. 치과 치료를 받은 시간이 어느 정도 되냐고 물으니 30분이 넘었다고 하셨다. 필자는 “임플란트나 교합에는 문제없이 잘 치료되었습니다. 다만 치료를 오랜 시간 받는 동안에 긴장하고 힘을 쓰셔서 다음날 온몸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옛날 말에 이 빼고 몸살 났다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차차 좋아지실 것이니 살살 조심해서 사용하시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마음 편해하며 가셨다. ‘이몸살’이란 필자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환자가 치료가 잘못됐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의사가 알 수 없는 증상들도 많고, 환자들이 자신 생각 속에 몰입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좀 더 진전되면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게 되고 치료해준 의사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물론 환자도 의도적
신축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맞지만 올해는 지난해의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는 이유로 여전히 어렵고 힘들게 시작되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새해는 새롭게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그리 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이치입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코로나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으니 코로나 또한 새해에는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홍수가 지나가고 나면 흔적이 남듯이 코로나가 지나고 나면 그 후유증이 다양한 형태로 남을 것이니 이에 대처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할 것이 예상되기도 합니다. 100m 전력질주 가 끝나면 앉아서 쉬는 것이 다음 순서입니다. 지난 경자년은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견디며 전력으로 버텼으니, 신축년에는 버티기를 멈추는 해이길 바랍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가장 진한 어둠도 여린 여명에 사라집니다. 그런 믿음으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신축은 12간지로 보면 하얀 소의 해입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동물이 소입니다. 다만, 소 자신은 모든 것을 희생하여 타인을 이롭게 하는 동물입니다. 동양철학 면에서 보면 신축(辛丑)은 오행으로 금(金)에 해당되며 의미는 결과입니다. 오랜 세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12월 21일)은 동지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평생 할 일을 다 한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아마도 평생 들을 트로트 노래를 다 들었고 평생 쓸 마스크를 다 쓴 듯하다. 일 년 내내 TV에서는 트로트가 아니면 코로나 이야기뿐이었다. 며칠 전 트로트 경연 대회에서 어린 출연자가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 가사 중에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란 구절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노래 가사 때문인지 왠지 동지라는 단어는 북풍한설의 눈보라를 연상하게 한다. 노래 가사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 북쪽 유일한 외곽도로인 돈암동 미아리고개에서 1.4후퇴 때 피랍되던 가족들과 작별을 하던 장면을 묘사하였다. 그런 이유인지 전쟁 이후부터는 늘 동지는 추위와 배고픔의 상징처럼 되었다. 하지만 전쟁 그 이전에는 의미가 달랐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동지는 정월대보름과 같은 느낌의 명절이었다. 가장 풍요로운 추석이 지나고 마지막 겨울 준비인 김장까지 모두 끝나서 한 해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새경도 받았고 먹거리도 넉넉한 때이며, 봄이 올 때까지 쉴 수 있는 일종의 휴가가 시작되는 기쁜 날이었다. 양식이 모두 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