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원에서 심리학 강의를 듣는 중에 세대 간의 생각의 차이를 논의하게 됐다. 20대 중반의 한 여학생이 집에 강아지가 새끼를 두 마리 낳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거렸다. 반면 50대 초반인 필자는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다는 말에 어떠한 감동도 감정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것이 30년간의 우리 사회의 세대차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수업이 마무리됐다. 물론 필자가 50대의 대표적인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필자 세대는 적어도 형제가 4~5명이였다. 개발도상국 시절을 지나오며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아 초등학교에서는 혼식, 분식 장려운동을 해서 하얀 쌀밥을 도시락으로 가져가면 엉덩이에 매를 맞던 시절이었다. 선생님들이 잘못을 행하는 아이에게도 매를 들지 못하는 지금의 학교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니 어찌 30년간의 세대 간에 이해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필자는 아직도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야기에 감정의 움직임이 없다.
반면 동물 보호가이신 대학 선배님의 이야기를 들을 땐 감정의 움직임이 있었다.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예쁘신 선생님이시다. 그분은 동물에게 애정을 지니고 동물보호운동에 참여하며, 따라서 동물가죽으로 만든 옷이라든지 가방 같은 것들을 사지도 착용하지도 않는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땐 필자도 동물을 학대하는 행위의 잘못과 인간들이 동물들과 공존해야 하는 것에 공감하고 조그마한 노력이라도 실천하는 것에 감동했다. 왜 전자의 경우는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데 후자의 경우엔 감정이 움직였을까 생각해보면, 전자의 경우는 동물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의 움직임이 더 커서 상대방인 필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한 반면 동물보호운동의 이야기는 선배님의 실제 동물에 대한 사랑이 필자에게 전달됐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강아지의 탄생이라는 사건이 50대의 감정을 자극하기에는 우리 세대가 너무 험한 것을 많이 보고 경험하고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한다.
진화에 대해 강연하시는 최재천 교수는 지금과 같은 환경 위기에 대한 각성을 토대로 그는 인간이 ‘공존하는 지혜’를 가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가 돼야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이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지 않으면 파멸한다는 이치를 설명한다. 그동안 인간은 ‘현명한 존재’를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란 용어를 사용하며 자연을 지배하려해 왔다. 그것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승자독식을 인정하고 축하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자연은 공존하지 않으면 파멸로 가는 것도 진화라고 설명한다. 더불어 기생충학에서는 인체에서 기생충이 사라지면서 면역기능이 저하되어 알러지나 아토피가 증가했다고 말한다. 기생충을 제어하려고 면역기능이 강했는데 기생충의 소멸로 인하여 면역기능이 불필요해진 탓이다. 반면 기생충은 절대로 배불리 먹지 않는다. 호스트가 죽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명체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법칙을 철저히 지키며 살고 있지만 인간만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미명아래 자연계의 균형을 파괴하고 있다. 이 시대는 우리 인간들도 기생충의 본능적 절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와 직면해 있다. 최 교수는 호모 심미우스는 ‘통섭(consilience)’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해 세상과 사물을 넓고 깊게 보는 통섭적인 인재가 되면 왜 절제하고 불편을 감수해야하는지 이해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창밖에 겨울비가 내린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향이 참 좋다. 아직 필자의 감성이 없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강아지의 탄생이 자극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20대의 눈물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20대의 눈물보다는 모피 옷을 입지 않는 선배님의 마음이 따뜻한 커피향 만큼이나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