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어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모습이나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없고 희망마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살리고자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을 떠나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살던 보릿고개 시절의 경제적인 것을 떠나서 어머니들은 한결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아이를 부잣집으로 양자를 보냈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아이를 기르기 어려운 엄마들은 아이를 부잣집 문 앞에 놓고 가거나 입양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근대까지도 미혼모와 같이 아이를 기르기에 경제적이나 상황적으로 어려울 때에도 아이에 대한 기본적인 모성애와 사랑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발생하는 사건들은 너무도 상식 밖의 일들이어서 차마 입에 담기에도 불편한 내용들이 많다.
얼마 전 다섯 살 된 아이를 친엄마가 살해하고 저수지에 유기한 일은 이 시대를 같이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유가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엄마는 자기처럼 힘들고 구질구질하게 아이도 살아갈 것이 싫어서 미리 죽였다는 것이다. 먹고 살 것조차 없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면서도 아이만이라도 살리려던 과거의 어머니와 최소한의 노동을 하면 먹고 사는 것은 해결되는 세상에서 힘들게 살지 말라고 아이를 살해하는 지금의 어머니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불과 60년 사이에 이토록 변했을까? 또 그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풀릴 듯 말 듯한 수학공식처럼 머릿속에서 맴돈다. 첫째는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대장 브리바’라는 옛날 영화중에 주인공이 나쁜 짓을 하는 아들을 총으로 쏴죽이면서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둔다”라고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 영화 속에서는 세상에 악이 되는 악당을 제거한 것이지만 아이의 엄마는 자신에게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얼마 전 아이들을 기르기 귀찮다는 이유로 수면제를 먹이고 한강다리에서 던져버린 비정한 스무 살 아빠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아빠가 자신은 기독교인이라서 구원과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마치 게임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둘째는 상대적 빈곤감의 심화이다. 부자들의 삶, 권력층의 삶을 드라마나 인터넷 등을 통해 간접적 지식으로 많이 습득해 비관하는 것이다. 마치 국회의원이 그 지위를 그만둔 뒤에 오는 상실감과 패배의식에 힘들어 하듯이 말이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했으나 다른 대학에 입학해 자살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어떤 강연회에서 과거의 어머니와 현대의 어머니에 대한 화두를 던진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분이 요즘은 부에 의해 신분이 고정되는 경향이 있고 부는 탄생하면서 결정돼 자신의 능력이나 노동으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시대인데 이런 빈곤세습의 시대에 어떤 힐링법이 있냐고 질문했다. 필자도 요즘은 4,000만원짜리 핸드백을 보면 느끼는 생각이었기에 공감했다. 요즘의 부와 빈곤이 양반제도처럼 세습되는 것도 공감한다. 필자 또한 출근하기 싫을 때마다 생각나기에 공감한다. 하지만 이것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다. 물질적인 풍요만이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조건이 아니라 행복은 다양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방법이 종교생활이다. 물질적 가치만큼 정신적 가치에 비중을 준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비우고 버리고 놓으면서 얻는 원숙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그림을 처음 그리는 사람은 무엇을 그려 넣을까를 고민하지만 원숙한 화가는 무엇을 그리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많지 않은 한두 사람이더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숨이 가쁘도록 복잡다단한 이 시대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