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중랑구에 위치한 신내노인요양원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온다. 중랑구에서 개원하고 있는 허훈 원장을 비롯한 7명의 치과의사다. 2004년부터 시작된 발길은 올해로 10년째 꾸준한 진료봉사로 이어지고 있다. 10년 동안 봉사활동을 했지만 봉사팀 이름도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 그저 나누고 베푸는 것에 만족해할 뿐. 중랑구회 신내노인요양원 봉사팀을 이끌고 있는 허훈 원장을 만나봤다.
빈 치과진료실에 퍼진 사랑의 온기
신내노인요양원은 설립 때부터 요양원 어르신들을 위한 치과진료실이 마련됐다. 치과의사인 박정숙 수녀가 설립 초기 신내노인요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치과진료실은 텅 비게 됐다. 당시 중랑구치과의사회 회장이었던 허훈 원장은 신내요양원을 직접 둘러보고“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많아 방문 진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허훈 원장을 필두로 김윤만·선민권·안병주·정현구·한재범·허준호 원장이 2004년부터 봉사를 하고 있다.
한동안 비어있던 치과진료실은 매주 토요일마다 환자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봉사에 나선 원장들은 “우리지역에 비어있는 치과진료실이 있고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있는데 직접 찾아 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입을 모았다.신내요양원은 228명의 어르신들이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의지할 곳 없고 얻어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중증 노인 환자가 대부분이다.
봉사팀은 중환자들의 틀니를 직접 빼서 세척하고, 관리가 되지 않아 생긴 염증을 치료하고, 구강검진과 간단한 보철은 물론 틀니까지 지원하고 있다.
환자가 아닌 나의 아버지, 어머니
봉사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떠나 보내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특히 노인요양원인 신내요양원은 대부분 80세 이상이다. 100세 이상의 어르신도 6명이나 있다.
허훈 원장은 매주 진료해주던 환자들이 운명을 달리 할 때 가장 힘들다. “몇 번에 걸쳐서 치주치료를 하고 정작 틀니를 제작해 장착하러 갔더니 이미 돌아가시고 안계셨다”며 “틀니를 하게 돼 너무 좋다며 볼 때마다 연신 ‘고맙다’고 했는데, 틀니를 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셔서 너무 아쉬웠다”고 말했다.
봉사팀은 단순히 치료만 하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마다 방문해서 1주일간의 안부를 묻고 말상대가 되어주며 어르신들의 ‘아들’역할까지 충실히 해왔다.허훈 원장은 “저들의 모습이 하나도 낯설지 않다”며 “남이 아닌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고, 앞으로 나의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해드리기 위해 신경 쓰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전했다.
봉사단원 모두가 10년간 변하지 않고 함께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봉사라기보다 세상을 먼저 살아오고 이끌어 온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훈 원장은 “단순히 봉사라고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하지 못했을것”이라며 “내가 가진 재능을 기부하러 갔지만 정작 내가 얻는 것이 더 크다”고 전했다.
10년의 봉사, 10년을 이어갈 봉사
봉사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허훈 원장은 변함없이 진료 계획을 세운다. 3개월 단위로 짜는 봉사단 일정도 여전히 허훈 원장의 몫이다.
날씨가 풀리는 3월에는 신내요양원에서 생활하는 환자 모두를 대상으로 구강검진을 할 예정이다. “매년 한 번씩 전체 구강검진을 통해서 예방도 하고 1년의 진료계획을 세운다”고 전했다. “어르신들에게 먹는 즐거움을 돌려주는 재미로 봉사한다”는 허훈 원장은 앞으로 주 1회에서 주 2회로 진료를 늘릴 생각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다 보니 어르신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수요일에도 진료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훈 원장은 “지금 내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예전에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고, 누군가 했던 봉사 위에 살아가고 있다”며 “그렇기에 나의 봉사는 계속하고,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면서 “치과의사로서 진료를 할 수 있는 한 봉사는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허훈 원장은 마지막으로 함께 봉사하고 있는 봉사단에게 감사를 전했다. “우리 봉사단은 운동장의 릴레이 달리기 선수처럼 매주 진료봉사라는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10년간 흔들리지 않고 함께해온 우리 단원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김희수 기자/G@s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