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 드라마를 보다보면 내용이 잔인하고 역겨워 다른 채널로 바꾸거나 차라리 시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막장을 넘어 사이코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 자극적인 것을 택한다지만 점점 도를 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심리적인 한계가 있건만 정상적인 삶의 내용을 넘어서는 과도한 전개로 인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드라마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느끼고 괴로워할 수 있는 범주를 다뤄야 한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시청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로 인하여 실제적인 사람들의 심리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슬퍼해야 할 상황에서 담담하거나 공포 상황에서 웃는 것 같은 일반 심리와 위배되는 행동으로 시청자에게 혼란을 준다. 더불어 병적심리와 정상심리 사이를 멋대로 이동한다. 이런 경우에 시청자도 정서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드라마가 나쁜 드라마다. 자의든 타의든 나쁜 일을 했을 때에 사이코패스가 아니고는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의 악당은 모두가 심리적인 갈등이 없다. 더불어 그 악역과 같이 동참하
몇 달 전 일이다. 일본에서 수련하던 시절의 일본인 수련동기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위급함에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글의 말미에 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오라는 근심어린 당부의 말도 있었다. 반년 이상을 유지해오던 남북한의 긴장관계가 만들어낸 촌극과 같은 메일이었다. 걱정해주는 마음은 감사했지만 연례행사처럼 겪는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니 씁쓸하였다. 이런 긴장상태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그런 일들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개개인 모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가 만들어낸 사건이 개인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직접 미치는 일례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역사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과거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라 현실에 강한 영향을 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얼마 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질문으로 전쟁을 유발시킨 쪽이 북측인지 남측인지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답변에서 남침이란 정답을 맞힌 청소년이 70%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역사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남침’과 ‘북침’이란 단어를 몰라서 틀렸다고 한다. 답은 북에 의한 남침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요즘 치과전문지를 뒤적거리다보면 인문학과 관련된 강연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잊고 지냈던 것에 대하여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지금 치과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일들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에 또한 반갑다. 누군가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흙을 만지고 모래놀이를 하며 학교가 파한 뒤에 하루 종일 잠자리를 잡던 추억을 떠올린다면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이 있다. 그 고향의 추억은 힘든 삶 속에서도 견디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 잠시 차 한 잔을 마시며 과거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현실을 다시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희망과 에너지를 받는다. 어려서의 행복했던 순간들의 추억과 경험은 그렇게 삶에서 순간순간 행복의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사라진 세대들이 많아졌다. 어린 시절의 그리운 추억은 없어지고 입시 교육과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진 삶을 사는 시절을 겪다보니 좌우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너무도 많아졌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황금만능주의와 남을 이겨야 내가 산
이미 사회 속에서도 많은 곳에서 객관적인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알게 모르게 사용하고 있다. 말은 객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을 짙게 띠고 있다. 원인은 따지지 않고 결과만을 생각해 필요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예를 들면 청소년 학교폭력이 증가하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학교폭력이 있는 학교를 실태조사하면 학교폭력이 발생한다고 보고하는 학교가 거의 없다. 이는 학교폭력을 직접 담당하는 일선 학교에서 폭력사실이 학교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원인을 찾아서 밝히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별일이 없는 것으로 덮으려는 것도 이미 학교의 집단적인 이익을 위한 이기주의에서 만들어진 묵시적인 프레임인 것이다. 이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객관적 프레임의 한 형태이며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소위 말하여 ‘쉬쉬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에는 거의 이런 현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정적인 객관적 프레임의 형태라고 본다. 반면 긍정적인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식당처럼
우리는 살면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해야하는 경우를 많이 직면한다. 그럴 때마다 심리적인 고통을 받거나 정서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는다. 가까이는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에 서로간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경우를 종종 접한다. 그때마다 원장들은 판단의 어려움을 겪는다. 또 드문 일이지만 대변인 성추행사건처럼 기자회견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 속속 거짓으로 들어나는 것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여야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국가적인 거짓말을 처음 눈으로 접한 것은 일본에 갔을 때이다. 일본정부가 너무도 당당하게 독도가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국가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권위를 이용한 거짓말이다. 이런 식의 크고 작은 거짓말들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한 필자는 나름대로 거짓말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거짓말은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며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세운 이 가설을 사건들에 대입해보니 모든 것이 잘 해석되었다. 사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금방
며칠간 인터넷 검색어 1위가 대기업 임원의 승무원 폭행사건이다. 유명한 국내 대기업의 임원이 미국행 비행기의 비즈니스 좌석을 타고 가면서 발생된 일이다. 그 임원은 기내식으로 제공된 밥이 설익었다고 한 후에 다시 라면을 달라하고는 “라면이 설익었다”, “라면이 짜다”와 같은 트집을 잡다가는 급기야는 여승무원을 들고 있던 잡지로 때린 사건이다. 그로인해 미국입국이 거부되고 되돌아온 일이 인터넷에 알려지면서 급기야는 검색어 1위까지 오르며 네티즌의 관심이 쏠렸다. 대기업 임원의 인격적인 자질문제와 비열한 행동에 네티즌이 분노했다. 특히 특권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이유에 네티즌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급기야는 그 대기업의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사태까지 오자 결국 기업에서는 임원을 보직해임하고 해당 임원은 사표를 내고 일단락되었다. 그 사이 네티즌들은 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내었고 그 대기업은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필자는 이 일을 보면서 그 임원의 행동을 심리적으로 생각해보았다. 과연 진짜 라면이 짜거나 설익어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보통 진상행동을 하는 고객들의 내면에는 원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직접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이유나 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