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두 번째 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가 3년 전 장치비를 안 내고 갔던 환자입니다”라고 실장이 조용히 말한다. 3년 전, 환자가 교정장치를 제거하는 날은 유지장치 비용이 있음을 미리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오셔서 비용을 지불할 거라고 하여 장치를 제거했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고 20대 후반인 본인은 카드도 없고 현금도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실장이 직접 엄마와 통화하고 내일 와서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날 이후로 환자나 엄마가 전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실장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런 사연을 알고 환자 곁에서 무슨 일로 내원 했는지를 묻자, 유지장치를 분실하여 새로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이에 3년 전에 치료비가 지불되지 않았음을 주지시키고 유지장치를 찾으러 올 때는 반드시 비용을 지불하셔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장치를 찾아가는 날에 데스크가 소란해 가보니 환자가 또 비용 준비를 안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또 엄마가 내일 와서 준다고 한다. 3년 전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에 필자가 엄마와의 통화를 원했고 환자가 전화를 걸어주었다. 3년 전 상황을 이야기하고 송금해줄 것을 요구하였더니 등산 중이어
“선생님, 드디어 남편이 일요일에 TV 야구를 안 보기로 했어요!^^”하고 뿌듯한 듯 제자가 이야기 한다. 개업의를 남편으로 둔 제자이다. 같은 직종의 종사자로 같이 일하고 힘든데 남편이 휴일에 설거지도, 아이를 돌보는 일 등의 가사 일도 전혀 돕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터 불만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왜 그리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남편이 가사 일을 도와주는데…”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필자가 “그럼 다른 직장인 남편보다 의사라서 경제적으로 나을텐데 그것에 대한 보상은 무엇으로 해 주고 있나요?”라고 물었다. 남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남보다 조금이라도 못 받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 받아야한다는 욕심인 것인가? 물론 아내에게 휴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은 본인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다. 그런데 야구장에 직접 가서 현장에서 생맥주 한 잔 마시며 목이 터져라 응원하며 관람하고 싶은 마음을 접은 이유가 휴일에 가족을 버리고 나간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십분 양보해서 집에서 TV를 보는 마음을 아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야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언제부터인가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 같다. 쉰하나의 나이에 정체성 혼란이 무슨 말인가 싶지만 내면의 생각을 짚어 볼수록 확신이 든다. 얼마 전 일이다. 치료를 받던 20대 중반 여성 환자로부터 치아가 이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초진 모델을 보여 주고 켈리퍼스로 재서 발치와로 치아가 4㎜ 정도 이동된 것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못 믿겠다고 우기는 일이 있었다. 결국 마음이 급하다 보니 눈으로 본 것도 믿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필자가 “그럼 어떤 식으로 설명하여야 하느냐”고 묻자, 환자는 그제야 수긍을 하였다. 그리고는 이야기 끝에 “내가 내 돈 내고 치료받는 건데 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결국 돈 받으려면 그 정도는 참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동안 당할 만큼 당해서 잘 견딘다고 생각 했었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로 가슴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치과의사들이 커다란 잘못이나 한 듯이 방송을 하고 난리가 아니다. 무슨 공공의 적이나 되는 듯, 무슨 큰 잘못이나 한 듯 그런 뉘앙스이다. 치과의사의 위
얼마 전 지상파 TV뉴스에 치과의사의 내용이 다뤄졌다. 임플란트를 불법으로 중국에 밀수출 시키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또 치과의사협회가 무슨 큰 죄를 지은 듯한 내용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최고의 벌금을 내렸다는 내용의 뉴스가 방송되었다. 그리고 주변의 치과의사가 아닌 지인들로부터 내용의 진위를 묻는 전화나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세상의 눈과 우리 치과의사의사들의 눈높이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난다. 그리고 답답함에 치가 떨린다. 눈앞에 사기꾼이 있는데 뭐라고 이야기해도 남들이 믿어주지 않을 때의 그런 답답함, 그리고 내가 사용한 말투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듯한 그런 답답함이다. 이 사회는 오래 전부터 이런 답답함을 해결하지 않아서 결국 모든 이들을 방관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담배 피는 중고등학생을 보아도 외면하고,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보아도 외면하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처세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즉, 사건의 본질을 따지지 않고 그 각각의 논리를 따르는 문제 때문이었다. 중고등학생을 훈계하다가 시비가 붙어서 한대 쥐어박으면 폭행죄에 해당되어 피의자 신분으로 합의를 보아야 하는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상황, 길거리에 쓰러진
병원에 근무하는 남자선생이 아들을 출산하였다. 지면을 통하여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임진년이란 세대교체의 시기에 새 생명의 탄생은 새로운 일들의 시작과 출발을 의미한다. 더불어 구시대의 생각과 습성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 시대에 탄생의 의미는 구세대의 퇴장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세대’란 사전적 의미로 공통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공통의 의식이나 풍속을 전개하는 일정폭의 연령층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아이가 성장하여 부모의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기간으로써 약 15~30여년 간을 표준으로 한다. 서양의 사회학자 만하임은 세대를 사회학적 의미로 해석하여 세대의 상황, 세대의 관련, 세대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세대의 상황은 세대가 태어나는 사회적 기반을 말하는 것으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동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일정한 사회에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대의 관련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공통된 문제를 가짐으로써 생기는 것을 말하고, 세대의 통합은 집단생활 속에서 서로 결합하고 서로 작용함으로써 일정한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반면 동양적 개념의 세대는 ‘세’와 ‘대’의 합성어로 ‘세(世)’는 사람의 한평생을 뜻하고
아침 TV프로그램에서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환자가 5년 동안 66% 급증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을 보았다. 최근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인터넷이나 신문지상에 거론되어 이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두 번쯤은 들어본 단어로 조금은 익숙해진 질환이다.이를 보던 필자는 결국 이런 증상을 확증하기까지나 아니면 질환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환자가 많은 고통을 겪는 바도 있지만 그 주변 사람들 또한 심리적으로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인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 안타까웠으며, 또한 그런 환자가 치과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면 치과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 있으므로 치과의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환자의 행동이나 반응으로 놀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심리학에서 공황장애는 이상심리로 분류 한다. 이상심리에는 기분장애, 불안장애, 성격장애, 신체형 장애, 정신분열증 등과 같은 것이 있으며, 그 중 불안장애에 범불안장애, 공황장애, 강박장애, 공포증 등이 포함된다.공포증에는 고소공포증 같은 특정공포증, 사회공포증, 광장공포증 등이 있다. 따라서 공황장애는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불
출근길에 차창 너머 멀리 보이는 달맞이 동산을 뒤덮은 개나리의 노란색과 한강이 어우러져서 절경을 이룬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일요일에 운동 삼아 나가본 한강변에 흰색에 약간의 핑크빛을 머금은 벚꽃은 정말 예뻤다. 더불어 땅 위에 돋아나는 쑥이나 민들레 같은 파란 싹들의 초록빛은 마음에 평화를 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산천초목의 변화와 함께 환경에서 보여지는 색채 또한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색채심리학자에 의하면 색채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반면에 색채에 따라서 마음의 변화가 오기도 한다. 이에 심리학에서는 색채를 이용하여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로 색채 테라피가 있기도 하다. 필자가 생각해보니 봄철에 발견되는 색들은 사람의 마음에 평화, 위안, 희망 등을 주는 긍정의 에너지를 지닌 색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수만년을 겪으며 살아온 인간에게는 혹독한 겨울을 참고 견디며 처음 봄이 왔을 때 보이는 색채들에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끼는 유전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녹색은 마음에 평화를 준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녹색이 있을 때는 동식물의 먹을 것이 풍요롭다는 것이 기본으로 전제되었기에 마음의 평화를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붉은색은 따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