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아는 노래 중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란 노랫말이 있다.
성경 속에 나오는 글귀인 것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이며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남에 대한, 남을 향한 사랑을 떠올린다. 그것은 사랑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남녀간의 사랑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듯이 남을 사랑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강요를 받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 중에 최고는 어머니의 사랑이라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사랑’을 남에 대한 사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그 어느 곳에서도 자기에 대한 사랑을 배워본 적이 없다. 게다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리는 풍토속에서 자기를 누르고 참고 인내를 해야만 좋은 사람이라고 강요되어 왔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과 이기심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 상점에서 불만 고객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최소한의 품위를 지킨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신의 격이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욕심만이 있기에 자신의 품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격 떨어지는 행동과 행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소중히 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 또한 배워야 한다. 공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회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 우리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함부로 손상을 입히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 했다. 자신의 신체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으로 현대식으로 표현한다면,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일게다. 결국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남을 해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행복하여야만 남에게도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다. 나의 사랑이 넘쳐야 남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공자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다. 자신을 바로 세워야 가정, 즉 가장 가까운 이들이 바로 되고 그래야 치국도, 평천하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남을 위하여 희생을 하거나 강요당하고 산다. 물론 희생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본인의 행복을 잃은 희생은 잘못이다.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정작 본인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가정은 화목하기 어렵다. 끝없는 희생은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절대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자신을 위하여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어디서도 배워 본 적이 없는 반면 상대를 누르고 쟁취하는 이기심만 배웠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이고 결국엔 외로움으로 돌아온다. 이기심이 아닌 진정 자기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남도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소중할 때 남도 소중한 법이다. 요즘 쉽게 자살하는 풍토를 보며, 얼마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딸에게 항상 예쁜 그릇에 식사하라 말한다. 스스로 자신을 소중히 대접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공주처럼 예쁜 말을 쓰라고 한다. 그래야 남도 그렇게 대접하고 본인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의 말 속에는 욕이 반쯤 된다고 한다. 이는 스스로의 품격을 못 찾기 때문이고, 또한 이를 방관하고 이기심과 자기 사랑에 대한 생각이 없는 부모들의 탓이다. 아이가 어리다는 생각에 방관하다가 사춘기가 넘으면서 고쳐 줄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또한 부모의 직무유기이다. 이기적인 부모가 이기적인 아이를 만든다. 부모가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기에 아이들이 모르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변해야 아이가 변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그렇게 부모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학교폭력이 사회의 이슈인 지금 진정한 자기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 최용현 원장(STM치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