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본과 3학년 수학여행 때 처음 가 본 곳이었지만(무려 1997년 되시겠다), 10여년 전부터 사계절 간 여러 지역을 넘나들며 오가다 보니 이제는 동네도, 풍경도 식당의 간판들까지도 낯설지 않은 곳이 되어 있었다.
수많은 제주여행을 다니며 부모님을 위한 코스였든, 아이들을 위한 일정이었든, 외국에서 온 지인들을 위한 일정이었든 목표는 빠른 시간 안에 한 바퀴를 죽 돌려주는 것이었으며, 목적에 맞게 스피드를 올리려면 렌트카는 제주여행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2022년 2월, 동네지기들에게 공항 뒷동네 어영공원에서부터 협재항까지의 올레길 걷기를 제안 받았다. 이전에 올레길을 이용하던 형태는 차로 올레길 시작점으로 가서 주차를 하고 올레길만 잽싸게 걸은 다음 택시를 타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던 식이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걷기만 하는 여행을 제안 받은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방식이었지만 힘들어서 안될 것 같다는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준비하고 여행을 떠났다.
걷기여행의 성공은 맑은 날씨가 관건인데 2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박3일 일정 동안 맑고 따뜻한 날들(중간에 망고빙수도 시원하게 먹을만큼)이었고, 숲길을 걷다가 갑자기 마주친 이호테우 해변은 뜻하지 않게 감동적이어서(차로 해변주차장을 찾을 때는 못 느꼈던) 얼마든지 계속 걸을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언제 다시 도전해보나 하던 차에 자주 드나들던 치과의사 선배님 K1 ,K2와 의기투합하여 2023년 6월 연휴를 맞아 금요일 진료가 끝난 후 바로 제주로 날아가서 월요일에 돌아오는 걷기여행을 계획하였다.
K1은 누가 봐도 엄청난 운동으로 몸매를 관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체력이 약해서 한 달 전부터 1시간 걷기 연습을 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선배의 열정에 보답하는 길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6월 풍경을 간직한 제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길을 생각해 내는 것이었다. 네이버 카페와 남편의 경험담을 참고로 27개의 올레 코스 중 함덕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성산일출봉을 지나 광치기 해변에서 끝나는 코스를 결정했다.
함덕해변에 위치한 호텔의 통창에서 내려다보이는 함덕바다가 너무 아름답고(날씨가 맑아야 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델문도 카페에서 마시는 모닝커피의 감성을 같이하고 싶어서였다.
금요일 진료를 마치고 정신없이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또 공항에서 함덕까지 1시간 이상 좌석버스를 타고 갔다. 네비게이션이 항상 문 앞에 데려다 주던 것과는 다르게 몇십 개의 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혹시나 내리는 곳을 놓칠 까봐 긴장을 놓지 못하는 색다른 여행이 시작되었다.
체크인이 끝나고 예쁜 바다는 볼 수 없었지만 맛집 검색 없이 우연히 들어간 PUB에서 둥켈 생맥주와 맛있는 안주로 내일의 파이팅을 외쳤다.
제주 걷기여행에서 지금 소개하는 어플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걷는 동안 다음 숙소로 나의 캐리어나 큰 배낭을 옯겨주는 서비스다. 여러 곳이 활동 중이고 이번에 나는 ‘내 가방을 부탁해’라는 곳을 이용하였다. 아침에 계획대로 커피를 마시고 걸을 때 필요한 짐만 챙긴 후 신발끈을 동여매고 길을 나섰다. 캐리어는 호텔 프론트에 맡겨놓고 사진을 찍어서 다음 숙소 주소와 함께 카톡으로 연락하면 된다.
첫날 걷기의 목표는 함덕 김녕 세화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이고 하도리를 지나 종달리 펜션에서 마무리됐다. 김녕 세화 하도 해변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바다다. 그리고 작은 선물가게 들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했고, 쇼핑한 물건들은 본인이 메고 다녀야 하기에 적절히 구매욕이 다스려지기도 했다(6개월 전 기억을 더듬어가자니 작은 길들은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하고 지금의 마음은 ‘그저 좋았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지만...).
날씨가 좋았던 덕분에 더할 나위 없는 김녕 세화 바다를 보게 되었다. 해변마다 기가 막힌 위치에 카페가 있었으며, 제주 당근 주스는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었다. 걷다가 만나는 점심은 진짜 반가운 선물이다. 보기와 달리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들을 시키는 것도, 운전 걱정없이 대낮부터 반주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걷기 여행만이 주는 큰 선물이다. 이건 진짜 시도해 볼 만한 맛이다. 넉넉하게 먹고도 마음이 편한 건 다시 걸으면서 소화가 잘 될 거라는 믿음? 적어도 몸에 남아서 축적되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첫날의 목표대로 해질 무렵 종달리 수국펜션에 도착했다. 15㎞를 걸어 낸 것이다. 기쁨도 잠시 헉! 주변에는 펜션과 작은 리조트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지도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정보다.
펜션 앞의 수국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최고의 수국 시즌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많이 걸었는데 숙소 앞에선 택시가 안 잡히고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길은 외길이고 택시를 기다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에잇! 일단 걸어가자’라는 마음으로 저녁식당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숙소까지 계속된 수국길 덕분에 수월하게 걸었고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잘 먹게 되었다(올 때에는 다행히도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아! 네 바퀴 달린 탈 것의 고마움이라니...).
살짝 귀띔해 드리자면 저녁식사로 ‘소금바치 순이네’라는 식당에서 돌문어 볶음과 성게미역국을 먹었고 다음날 아침식사도 그곳에서 했는데 미역국은 저녁식사로 추천드린다. 아침에 막 끓인 미역국과 하루 종일 우러난 미역국의 맛은 같은 손맛이어도 꽤 차이가 났다.
둘째 날에는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아침 몸풀기로 작은 오름을 올라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지미봉’이라는 오름을 선택했는데 걸어서는 1시간, 택시로는 5분이었다. 아! 이렇게 경사진 계단은 얼마만에 올라보는 것인가? 아래에서 위쪽 계단 끝을 보는데 머리가 아찔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진짜 힘겨웠지만 정상에서의 전망은 작은 오름치고는 아찔한 360도의 제주풍경을 보여준다.
정상에서 숨을 몰아쉬며 그래도 지미봉까지 걷지 않고(걸어서 1시간, 택시로 5분) 택시를 탄 것은 신의 한 수 였다며 과감한 결정을 내린 서로를 치하했다. 지미봉은 결코 아침산책으로 시도할 곳은 아니었으나 전망은 무척 훌륭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지나는 길에 들러보시기 바란다.
다시 새 길을 찾아간다. 길에 가득 핀 수국은 한시간 정도는 함께 해주는 것 같다. 연약하고 비싼 꽃인 줄만 알았는데, 땅에 뿌리박고 뭉쳐서 피어난 수국들은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단단하게 밀어낸다. 수국과 함께하는 풀밭들을 지나다 보면 드디어 성산을 대표하는 우도와 성산 일출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 여정이 그 끝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번 여행도 날씨가 큰 몫을 했다. 걷고 있어도, 카페에 앉아 있어도 파란 하늘과 파아란 바다가 끝없는 자유와 에너지를 보내온다. 성산항에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께 제주도 특산물 생선을 보내려고 돌아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 급하게 세화 5일장에 가보기로 하고 콜택시를 불러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 갔다. 아! 이틀을 투자해서 걸었던 길이건만 택시비 1만 5,000원으로 계산이 끝났다.
인생 모든 일이 그런 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택시 안에서 바깥 풍경을 되돌아감기 하자니 어제의 하루가, 순간순간의 추억이 되살아 난다. 그래 억울해 할 필요 없겠다. 행복한 순간순간이 새겨져 있을테니…
성산시내의 숙소에 체크인하고 마지막 관문 광치기 해변에서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맑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광치기 해변이 바라다보이는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선물하며 2박 3일, 30㎞의 행군(?)을 마쳤다. “그래 너희들 아직 아주 괜찮아”
6월의 성공을 발판 삼아 1월에 제주 한라산 영실코스 눈꽃 등반을 계획하고 있다. 이 또한 한번 그 맛을 보면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올 겨울이 가기 전 여러분께 추천드린다.
올레 걷기 여행에 필요한 것 • 많은 메뉴를 시켜도 놀라지 않고 해치울 담대한 식사력 • 대낮에 반주를 즐길 수 있는 왕성한 음주력 • 걷기를 북돋워 줄 끊임없는 수다력 • 잘못된 길을 가지않게 적절히 리본이나 팻말을 발견할 수 있는 시력 • 가족보다는 친구, 선후배, 여성들을 멤버로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