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산에 오른다. 힘겹게 산에 오르다 꼭대기에 다다르고, 그리고는 다시 터벅터벅 산을 내려오는 산행의 과정. 문득 이러한 행위가 마치 성공이라는 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키워드 중 하나는 ‘성공’이 아닐까 싶다. 경제적 부를 누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과 학력, 눈에 확 들어오는 스펙을 갖추거나 권력을 누리는 직위에 오른 이를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성공의 외형은 이처럼 화려함을 겸비한다.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땀과 열정의 긍정적 단어도 속해 있지만, 비이성적인 과도함 또한 존재한다. 성공하려는 자의 행동은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기도 하다. 심지어는 성공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것처럼 맹목적이고 저돌적이다.
필자는 어떤 사람이 성공했느냐에 대한 평가를 산행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먼저 성공으로의 등정을 본다. 모두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각자 성공으로 가는 산세는 험준하기만 하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능력도, 인성도 달라서 오름들이 독특한 형세를 갖기 마련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나뉘지만, 중간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성공하기 위해 정상에 오르려고 무리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남들이 애써 말리는데도 강행하는 경우다. 그러면 탈진하게 된다.
성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야 할 곳이 아니라 반칙하지 않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면서 가야 할 여정인 것이다.
그다음 성공의 정상에 올랐을 때 변모양상을 본다. ‘저 자리에 앉혀 놓았더니 어쩌면 저렇게 변하지?’라는 말이 회자된다면, 당사자는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저 앞에서 굽신거리고 아첨하는 달콤한 속삭임에 취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면 개인뿐 아니라 조직에도 불행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정상에서의 하산 과정을 본다. 성공의 외형이 사라졌을 때, 또는 예전보다 영향력이 미미해질 때 과연 ‘사람들’이 남아 있느냐의 관점이다. 어떤 직위에 오르고 권한 행사를 하는 자리 때문에 사람들이 모일 수는 있지만, 실상은 그 직위에서 내려왔을 때의 상호관계가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이익이라는 매개체가 사라지고 이용할 가치(?)가 없어졌을 때 민낯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의리나 동지의식을 갖고 오랫동안 함께 했던 이들과 절연되어 있다면, 아무도 추억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하산의 루트를 잃은 것이다. 조난당한 것이다. 살면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한때 끈끈한 정을 나누고 의기투합하였던 전우들과의 단절은 여생에 쓸쓸함만을 남길 뿐이다.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성공한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대한민국 최상층부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성공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공의 벡터는 1차원적인 서열이 아니라, 공간적 다양성을 품은 3차원적이어야 한다. 이 끝없는 우주의 광대함에서 과연 어느 방향으로 앞서나가야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말이다. 삶의 경우의 수만큼 복잡다단한 공간에서 성공의 비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소히 이루는 작은 성공도 값진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세상에 지음(知音)처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몇이라도 아니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인생,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서두에 얘기했던 성공의 외형은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지인들과 만나고 특히 아랫사람들과 교류를 가지며 나이 들어간다면 당신은 성공한 삶을 산 것이다. 스스로 대견해 하며 오늘은 기분 좋게 술 한잔하고 자도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