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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치과생활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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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김범석 교수(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병원을 다니다 보면 알게 된다.

 

사람의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결을 바꾸어 가며 자신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을.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낯선 불청객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속도로 조용히 우리 곁을 따라오던 동반자다.

 

얼마 전 만났던 60대 후반의 구강암 환자도 그랬다. 종양은 수차례 치료에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더 이상의 수술이나 항암치료는 어려웠다. 감때사납게 붉게 성난 암덩어리는 다시 자라고 있었고, 목부위의 통증은 음식 한 숟가락도 허락하지 않았다. 입으로 음식을 삼킬 수 없고 몸무게가 빠지자, 나는 영양공급을 위해 위루술(gastrostomy, 위장에 구멍을 내서 음식을 입이 아닌 뱃줄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시술)을 권했다. 이 결정이 쉽진 않았다. 어떤 환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고 말하고, 어떤 환자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저는 제 몸에 또 하나의 구멍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억지로 이어 붙인 삶 대신, 제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을 살고 싶습니다.”

 

그 말은 어떤 절망보다 고요했고, 어떤 희망보다도 단단했다. 그는 치료의 가능성이 아니라 삶의 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담담함 안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생각했다. 존엄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남은 시간을 자기다운 방식으로 받아들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선택을 품고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수락이 흔들리지 않도록 누군가 곁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완화의료는 ‘포기’나 ‘중단’이 아니다. 완화의료는 고통을 줄이고, 삶의 질을 우선시하며, 환자가 남은 시간을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돕는 또 하나의 적극적인 치료이다. 완화의료는 생명을 포기하는 치료가 아니라 삶을 다듬어 가는 치료다.

 

완화의료로 방향을 돌린 뒤 그의 표정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적극적으로 통증 조절을 했고, 불면을 가라앉히는 약을 쓰면서 그는 한두 시간씩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은 여전히 삼키기 어려웠지만 입술에 물을 몇 방울 적시는 일만으로도 그는 안정을 찾았다. 그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음 속에는 그만의 평온이 있었다. 마치 마지막에 이른 삶이 스스로의 부피를 줄이고 남겨야 할 본질만 조용히 남기는 듯했다.

 

환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통증으로 나다움을 잃는 것, 마지막 순간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 고통과 혼란 속에서 이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죽기 전에 혼자 외로운 것, 그 두려움들이 환자들의 마음을 흔든다.

 

완화의료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완화의료의 본질은 “죽음을 잘 맞이하게 돕는다”가 아니라, “남은 하루를 잘 살아가도록 돕는다”이다. 의사는 종종 의학적 정답을 찾으려 하지만 삶의 마지막에서 필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이 머무는 자리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딱딱한 의학의 언어보다 함께하는 천천한 숨결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임종 하루 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그는 펜을 들고 천천히 한글자씩 써내려갔다. “선..생..님.. 저는.. 이제… 괜..찮..아..요..” 그 말은 삶을 길게 산 사람이 아니라, 삶을 깊게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완화의료는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 환자분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는 언젠가 반드시 ‘삶과 죽음의 질문’과 만난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언젠가 자신의 마지막 장면을 맞이한다. 그 장면이 소란스럽지 않고, 두려움보다 평온이 앞서며, 고통보다 자기다운 숨결이 남기를 바란다면, 그리하여 혼자보다는 함께로 남길 바란다면, 존엄한 임종과 완화의료는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질문이 아닐까? 남은 시간을 자기다운 고요로 채워 넣고, 꺼져가는 생명 안에 담긴 온기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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