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단어의 공통점은 영화제목이라는 것이다. ‘라푼젤’은 2009년에 디즈니사에서 만든 만화영화이고 ‘프레셔스’는 2010년에 미국에서 만든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이다. 라푼젤의 신분은 18세의 꿈 많은 예쁜 공주이고, 프레셔스의 신분은 딸 둘을 낳은 16세의 몹시 뚱뚱하고 못생긴 불행한 미국 슬럼가의 흑인 여자아이다.
이 두 영화는 볼수록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특히 삶이 힘들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방향을 잃었다고 생각이 들거나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있다면 볼만한 영화들이다.
라푼젤은 한 생명의 꽃을 기르는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어느 날 그 나라 왕비가 병이 들고 왕비는 그 꽃을 강탈한 뒤 병이 나아 공주를 출산한다. 꽃을 빼앗긴 여인은 노파가 되었으며, 젊음을 다시 찾기 위하여 공주를 납치하고는 숲속의 성에 가두고 딸로 키운다. 가짜엄마의 욕심으로 인해 과잉보호 아래 자라온 공주인 라푼젤은 세상은 무섭고 위험한 곳이라는 세뇌 속에 탑 안에 갇혀 18년 동안이나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온 왕자가 아닌 도둑 신분의 남자를 따라 탑을 탈출하고 자신의 진정한 신분인 공주를 찾아가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즉, 허구로 무장된 마음속의 탑에서 공주의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용기 있는 행동과 가짜 엄마라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나타낸다.
영화는 현대인들이 내면에 스스로 세상을 두려워하는 탑을 만들고 있지 않은지, 있다면 탑에서 나와 스스로 진정한 공주인 본인의 모습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프레셔스는 뉴욕 어느 빈민가에 엄청난 비만의 16세 흑인 여자아이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친아버지의 성폭행으로 두 명의 아이를 출산하고, 친엄마로부터는 연적으로 취급당하며 혹독한 학대를 당한다. 학교에서는 출산으로 인해 퇴학을 당하고 절망의 상태에서 대안학교를 찾게 되며 그곳에서 동성연애자인 선생을 만난다. 그리고 그 선생의 도움으로 조금씩 자아를 찾아나가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심리적으로 보호자이어야 할 부모조차 모두가 가해자인 상태에서 시작을 하여, 전혀 그 현실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에 동성연애자라는 결함은 있지만 충분히 훌륭한 선생의 도움으로 그 잘못된 구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부모로부터 철저히 상처받은, 16세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린 엄청난 비만의 여자아이의 희망이 전혀 없는 삶에 대해 현실속 관객은 어떤 해법을 지니고 있냐고 지속적인 질문을 던진다. 더불어 이미 만들어진 심리구조는 외부의 도움의 손길로 해결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도박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인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심리의 고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고착된 심리는 자신의 의지로 벋어날 수 없다. 선생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외부적인 자극에 의하여 고착된 심리구조가 깨져야만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라푼젤은 도둑의 도움으로 성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프레셔스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자아를 찾아나갈 수 있었다. 보통사람들은 ‘저 사람은 의지가 부족해!’ 혹은 ‘나는 의지가 부족해!’라고 체념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주어진 심리적 환경의 고착 상태인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게 하는 심리구조를 지니고, 살을 못 빼는 것이 아니고 살을 빼지 못할 심리구조를 지닌 것이다.
모두가 ‘포기’라는 쉬운 선택을 하고는 라푼젤의 심리적 탑을 쌓아 놓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타인이나 본인이나 탑 속에 나오지 않는 것을 의지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탑 속에서 나오고자 한다면 도둑을 만나야 한다. 그 도둑이 어떤 이에게는 취미이고, 어떤 이에게는 예술이고, 어떤 이에게는 여행일 것이다.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점심시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생각해보시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