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침드라마를 보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TV 드라마가 좋아진다더니 그런 모양이다. ‘삼생이’라는 드라마로 한국전쟁 때 태어난 한의사집 딸이 전쟁 후에 집사의 농간으로 신분이 바뀌고, 시골 아이로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식모살이를 오지만 이후에도 그 집사의 모함을 계속 받는 내용이다. 1960~70년대 배경이 필자가 자라던 서울 배경이라서 정겹고, 집사의 모함이 그 동안 세상 살며 경험했던 남들이 모르는 모함과 배신으로 마음아파하고 힘들었던 경험과 비슷하기에 더욱 공감이 간다.
얼마 전 대학을 다니는 아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과거의 어떤 사건에서 매우 억울했다고 말했다. 이에 필자는 “인생은 원래 억울한 거야. 그래도 아빠에게 억울하니 다행이지 남에게 억울해봐, 그건 더 힘들고 본인 심성도 나빠져”라고 말했다. 이어서 “고만고만하게 살 때는 문제없지만,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경쟁을 해야 하고, 기득권은 철저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어하기 때문에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심한 일들이 있다”고 충고했다.
이제 나이 쉰 살이 넘어서,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원하는 것이라고는 전원에 가서 자연인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보니, 이제야 나를 모함하고 시기하고 중상 모략하는 이들이 사라졌다. 결국 나를 그토록 미워하고 나 또한 미워했던 일들이, 모두 내가 무엇인가 바라는 일이 있었기에 그들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동물적인 저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일들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기득권이라면 더욱 손쉬운 것이다. 본래 법과 사상은 기득권자들이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기에 더욱 그러하다. 사상은 크게 두 개가 존재한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상과 이에 반대하는 사상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기득권들은 유교라는 사상으로 유지하려 하였지만 반대하는 이들은 ‘홍익인간’이라는 사상을 내놓았다. 결국 그것이 조선말기의 동학으로 이어졌듯이 말이다. 이렇게 학습되어진 기득권은 그래서 반드시 자신들의 행동을 ‘홍익인간’으로 포장한다. 이것이 기득권자들의 거짓의 시작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철저하게 믿고 자신이 마치 신념을 지닌 선구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대부분 사건에 해당된다. 갈등이란 항상 분배에서 오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먹이를 사냥할 때는 협력하지만 분배할 때 싸움하듯이 말이다. 최근 일례로 대통령이란 자가 부정부패와 비리로 얼룩져서 감옥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자를 자신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남들 모두의 눈앞에서 특사를 시킨다. 그리고 말은 대통합이라 한다. 기득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거짓말의 교과서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믿음이다. 스스로 철저하게 모두를 위해 행한 행동이라고 믿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필자가 수련의였을 때다. 전국 대다수의 치과의사들이 치과전문의제도에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전문의제도는 통과되었다. 역시 치과계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을 위하여 모든 치과계와 국민건강을 외면한 행동이었다. 그 후 예견된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일반인은 대부분의 응급실이 폐쇄되었기에 야간에 이가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그리고 치과계는 지금도 전문의제도로 불협화음이 지속되고 있다.
역시 그 때의 잘못된 선택이 다시 또 현재의 치과계를 분란과 혼란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때 대다수의 치과의사들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반대하였건만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그것을 집행하는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모르거나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할 만큼 누리고 산다는 것이다. 소수의 기득권과 대중의 싸움은 거의 기득권이 이긴다. 아주 드물게 대중이 기득권의 거짓 믿음을 넘을 만큼 수 많은 피를 흘릴 때만 대중이 이긴다. 그래서 이를 역사는 혁명이라고 했다.
과연 지금의 치과계는 어떤 선택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