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에서 20대 여성 출연자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에 음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온병에서 나온 음식은 불은 라면이었다. 평소에 선친이 불은 라면을 좋아하여 제사상에 올린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 50대의 어린 시절에는 대다수의 어머니들이 생선 머리를 좋아하셨고 김이나 달걀은 싫어하셔서 드시지 않았다. 필자가 어린 시절엔 어머니가 평생을 그렇게 말씀하셔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내 나이가 어머니 나이에 가까워지던 어느 날 어머니가 생선을 머리만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과 김과 달걀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던 시대에 비용을 줄이려고 당신들은 좋아하면서도 드시지 않고 자식이나 남편을 위하여 핑계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을 자식이나 남편은 어머니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청개구리 이야기가 비슷한 이야기이다. 항상 반대로만 행하는 아들에게 죽으면 물가에 묻어 달라고 했던 엄마 개구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청개구리가 마지막 엄마 개구리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물가에 묻는 행동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TV의 라면 제사상을 보면서 청개구리 우화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기우만은 아닌 것 같다. 상황을 유추해보면 그 출연자의 어머니는 일찍 작고하시고 선친 혼자 사셨다고 한다. 따라서 아마도 혼자 생활하시던 아빠는 챙겨 드시는 것이 여의치 않고 귀찮아서 자주 라면을 드시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딸이 가끔 집에 찾아왔을 때에도 종종 라면을 드시는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런데 라면을 자주 먹는 아빠 모습을 보고 딸이 걱정할 것을 우려해 불은 라면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딸의 이야기처럼 아빠가 불은 라면을 좋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필자가 기러기 생활로 8년간 혼자 살아도 보고 이제 50세가 넘고 보니 불은 라면의 제사상이 마음에 걸린다. 과연 젊은 딸이 나이든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하고 말이다. 먹고 싶었던 달걀찜을 아이들을 위해 싫어한다는 말 한마디로 양보하던 그런 배려심 말이다. 이런 식의 배려는 많은 가족이 같이 살던 대가족 공동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핵가족이나 1인 가족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배려심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눈앞에서 펼쳐져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의 중심이 ‘나’인 사람이 대가족시대의 ‘우리’의 개념을 지닌 엄마, 아빠 세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 형태가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는 적극적인 형태가 요즘 가족 간에는 필요하다. 그럴 때 비로소 ‘잔소리 그녀’에서 ‘엄마’로, ‘꼰대’에서 ‘아버지’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필자도 자식들과 방학 때에만 만나지만, 만날 때 마다 결국 필자입장에서는 충고이고 그들 입장에서 잔소리인 대화가 진행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요즘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오래 전 필자가 대학 시절 방학 때마다 선친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오고 늦게 귀가하던 생각이 난다. 그것이 부모 마음이고 그것이 자식의 마음인가 보다. 그 이유가 이제 생각해 보면 부모의 마음은 무언가 해야 할 시간이 적고 소중하기에 마음이 급하고 그들에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기에 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을 보는 눈의 차이이다. 심리학에 물이 반만 들어 있는 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있다. ‘반이나 남았네!’라는 긍정적인 사람, ‘반 밖에 없네!’라는 부정적인 사람, ‘이게 얼 만큼이지?’라는 회의적인 사람, ‘난 물보다 주스를 좋아해!’라는 다른 사고의 사람 등 다양하다.
과연 제사상을 받은 그분은 생전 불은 라면을 정말 좋아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