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진료를 올 때마다 요구사항이 바뀌고 늘 불만을 토로하는 남성 환자 한 분이 있다. 환자 불만을 들으면서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환자 질문에 논리적 설명을 하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본인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심리학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실행에 옮기기 전에 살기 위한 방편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고 한다. 그와 유사하게 그 환자 모습은 무의식중에 누군가로부터 자신에게 집중을 받아 위로받고 싶거나, 아니면 아직 우울증까지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아픈 상태여서 조그만 자극에도 힘들어하는 상태인 듯했다.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한다. 아프다는 것은 통증이 있다는 것이고 마음 통증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야단을 맞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경우에 마음이 아픈 것은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에 반응하여 아픈 것으로, 자극통증이다. 반면 스스로 내면에서 마음이 외롭고 쓸쓸하여 괴로운 것은 외부적 요인이 없이 아픈 것으로 자발통증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외부 자극통증과 내면 자발통증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결과만으로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물론 마
이솝우화에는 신에 대한 풍자가 많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헤로스 신을 모시고 제물을 풍성하게 바쳤다. 제물을 풍성하게 바친 만큼 잘될 것을 기대하고 씀씀이가 헤퍼졌고 제물에 점점 더 많은 돈을 사용했다. 어느 날 밤에 헤로스 신은 그에게 나타나 말했다. “여보게, 이제 재산을 그만 낭비하게나. 일방적으로 다 쓰고 나서 가난해지면 자네는 나를 탓할 것이 아닌가!” 신과 현실에 대한 자각을 풍자한 우화다. 인도에서 하루 30만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고 하루 사망자가 3,000명에 육박하며 통제 불능에 빠졌다. 이번 확산에 원인을 대규모 종교축제로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생사를 신의 뜻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종교문화를 외국인의 눈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종교를 떠나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증가하는 모습은 안타깝다. 인류가 시작되며 수많은 종교가 탄생했다. 종교 또한 인류의 역사와 함께 수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졌다. 10여개의 대표적인 종교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외 작은 종교들은 수없이 사라졌다. 그와 더불어 그들의 신들도 같이 사라졌다. 우리 민족도 많은 신들이 사라졌다. 단군신, 토지신, 산신, 삼신 등 불과 100여년 사이에 많은 토속 신이 사라졌
요즘 서울시치과의사회에서 ‘비급여 진료비 고지 의무화 의원급 확대’를 반대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행하고 있다. 진료비 공개 확대를 위한 의료법 개정으로 논란이 증폭되고 있으며 누구를 위한 법 개정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바뀐 법에 의하면 의원들은 홈페이지에 의료수가를 공개해야 하고, 치료 전에 의무적으로 비급여수가를 설명해야 한다. 거기에 심평원에 비급여 수가를 연2회에 보고하고 신고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보고 할 경우 최대 2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되는 입법예고까지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심평원은 ‘우리지역 좋은 병원 찾기’ 서비스를 운영하고 비급여 수가를 최고·최저가로 비교하여 보는 것까지 제공한다고 한다. 심평원은 전 국민건강보험을 시행하면서 의료기관이 의료행위에 대해 청구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평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이다. 즉 의료보험과 무관한 비급여는 상관없었다. 물론 그동안 100:100이란 표현으로 항목을 설정하여 100% 환자부담이란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강제로 1년에 2번씩 신고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어찌 마치 필자가 공산주의사회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제 의료
최근 병원 진료 중 ‘코로나19 감염’ 불안을 느낀 환자가 2배 넘게 증가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확진자가 연속해 500명에서 700명 선을 오가니 당연한 일이다. 필자 또한 환자를 진료하면서 감염을 걱정하는 빈도가 2배 정도 증가했으니 의사나 환자나 매일반인 듯하다. 전 국민이 1년 넘도록 코로나 불안을 기본으로 깔아놓고 생활하다 보니 모든 사건 사고가 증폭되어 나타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최근 뉴스들은 생각의 범위를 넘고 있다. 구미 여아사건은 아동학대 사건의 정점을 보여준다. 어제는 인천 모텔 영아 심정지 사건이 있었다. 최근 부모로부터 학대받고 사망하는 영유아가 증가했다. 아동학대 증가에 코로나19로 인한 스트레스 증가가 영향을 조금은 주겠지만 원천적인 원인은 아니다. 그럼 왜 최근 영유아 학대 사건들이 증가하는 것일까. ‘선녀와 나무꾼’에서 해답을 찾아본다. 선녀와 나무꾼에서 주인공은 나무꾼이다. 나무꾼은 세 종류가 있다. 우선 전문직종으로 나무꾼이다. 직업적으로 나무를 하여 장에 파는 사람들이다. 조선시대에 성저십리금장금송(城底十里 禁葬·禁松)로 도성에서 10리까지는 벌목과 매장이 불가해 멀리서 나무를 하여 전문적으로 파는 것이 가능했다. 두 번째
어느 날 세종은 조정대신들에게 뇌물을 주고받는 자를 처벌하는 뇌물금지법을 만들라는 어명을 내렸다. 받은 자만 처벌하던 것에서 공여자까지 처벌하겠다는 의도였다. 2015년에 시행된 김영란법의 원조였다. 사실 조선시대는 뇌물공화국이었다. 아전은 월급이 없었고 관직은 삼정승과 판서들 주청으로 이뤄지다 보니 수령과 관찰사들은 뇌물을 받고 올리는 순환구조였다. 뇌물은 국가재정을 악화시켰다. 이런 부패를 약화시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할 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세종에서 세조 때까지 재정 수입이 가장 좋았다. 이 법을 만든 세종은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을 만나고 판결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세종은 끝까지 파헤치지 않고 늘 흐지부지하게 끝냈다. 증거보다 진술에 의존하던 당시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무고한 사람이 만들어지고 힘없는 자가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세종은 뇌물방지법을 강하게 쓰고 싶었지만 힘없는 자가 더 많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세종은 재정수입을 증가시키고 공직자에게 적당한 경종을 주려는 목적만 달성하고 힘없이 억울한 무고한 자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으려 법 집행을 강하게 하지 않았다. 중국을
올해는 4월 4일이 청명이다. 하늘이 맑아진다고 하여 ‘청명’이라 하였는데 요즘은 황사와 미세먼지로 그 이름이 무색하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멀리 롯데타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악의 황사가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다행히 이틀 전에 내린 비로 조금은 맑은 편이다. 청명은 한식과 같거나 하루 차이가 난다. 한식은 식목일이기도 하다. 그럼 청명과 한식은 무엇이 다를까?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로 태양 위치를 기준으로 한다. 태양 횡경이 15도일 때이다. 반면 한식(寒食)은 동지를 기준으로 105일째 되는 날로 통상 양력 4월 5일 경이다. 청명은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한식은 지난해 사용해온 불씨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불씨를 집히는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날은 밥을 하지 않아 찬밥을 먹는 날이다. 청명엔 봄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논 밭둑을 손질하는 가래질을 품앗이로 하는 등 행동을 하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시대 한식에는 임금이 불을 나누어주는 사화(賜火)를 하였다.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로운 불꽃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이 불을 문무백관에게 내리고 이것은 다시 각 고을 수령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듯 새롭게 시작하는 철학적
불행이란 사전적으로 ‘행복하지 않음’이다. 즉 행복이 기준이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처럼 행복은 충분한 만족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욕심이 무한하여 충분한 만족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행복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에 따라 좀 더 많고 높은 것을 요구하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며 미래적이다. 반면 불행은 현실이다. 누군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생각이 필요하지만, 불행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답변이 나온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행복하지 않음’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행의 반대는 욕망을 기반으로 한 추상적인 행복이 아니고 현실을 기반으로 한 ‘불행하지 않음’이다. 행복은 이루기 어렵지만, 불행을 전제로 한 ‘불행하지 않음’은 이루기 쉽다. 과거 후진국이나 개도국 때는 물자와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좋고 나쁨이 아니라 구하기 어려웠다. 반면 지금은 물자와 먹을 것의 절대량이 넘친다. 과거에는 없어서 불행했다면 지금은 더 좋은 것을 소유하지 못해 불행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행하지 않음’은 조금 노력하면 얻을 수
용서(容恕)는 한자어이며 국어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보면 행위에 대한 설명이고 행위를 하는 주체자의 생각이나 마음에 대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한자 ‘容恕’를 풀어서 보면 ‘容’은 외적으로는 얼굴이나 용모를 의미하고 내적으로는 속내 혹은 속에 든 것을 의미한다. ‘恕’는 如(한결같음)와 心(마음)으로 구성되어있다. 한결같은 마음이 ‘용서할 서(恕)’이다. 즉 상대를 보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한다. 특히 如(한결같음)는 공(空)과 같이 일체 동요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여(如如)가 부처의 마음 상태이고 경지를 의미한다. 진정한 용서란 국어사전적인 행동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한자 뜻이 의미하는 내면적인 마음에서 상대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무심한 경지에 들었을 때가 진정한 용서다. 즉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다고 용서가 된 것이 아니다. 영어로 forgiveness 역시 for(멀리)와 give(주다)로 ‘마음 밖에 내 보내다’ 즉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자 의미와 유사하다. 상대를 보고 마음에서 분노든 미움이든 억울함이든 어떤 동요도 일어나
전북 정읍의 천년 고찰 내장사의 대웅전이 전소됐다는 뉴스는 매우 안타까웠지만, 53세 사미(예비승려)의 소행이란 소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동안 우려했던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화재사건은 예비승려에 의한 방화라는 종교적 범죄의 의미가 아니라 수 천 년을 이어온 전통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어 무너지며 나타난 파열음이며 사회적 경고다. 그간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스승과 제자 관계인 도제식 교육제도가 변질되고 전통이 파괴되어 온 지 오래되었다. 도제식 교육 중에 가장 오래된 곳이 불교 승려제도였다. 전통적으로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군대보다 어렵다는 행자 생활을 마치고, 예비승려 생활을 모두 겪고 나서 비로소 정식 승려가 되었다. 한 명의 스님이 되기까지 스승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하고 책임지는 전형적인 도제였고, 수행하는 내내 성취도를 늘 확인받고 인가받는 작업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출가자 수가 감소하면서 13~50세만 출가가 가능했던 연령 제한을 2017년부터 65세까지 확대했다. 도제식 교육에서 승가대학 같은 시스템 교육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때 이미 스님들 자질 검증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예비승려가 대웅전
KTX에서 94년생 여성이 반복되는 저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라고 말하며 햄버거를 먹은 사건이 화제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마스크 쓰기도 거부하고 큰 소리로 전화를 걸며 요청을 거부했다. 이 기사를 보며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과연 그녀의 아빠가 누굴까. 20대 여성이 공공장소인 KTX에서 규정을 어기고, 저지하는 이에게 반감을 갖고, 유치원생 정도의 말을 던진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 아빠는 어떤 생각일까.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라는 말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있다. ‘나는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가진 아빠의 딸이기 때문에 특권이 있다’, ‘나는 법을 지키지 않아도 언제든지 빠져나올 유능한 변호사가 많아서 법 위에 있다’, ‘나는 아빠의 돈과 힘으로 너에게 얼마든지 위해를 가할 수 있으니 알아서 기어라’이다. 7~80년대 군사정권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2021년인 지금 과연 그런 특수한 권력을 뒤에서는 모르지만 대놓고 누릴 수 있는 자가 누굴까? 대통령이나 장관 등 고위직과 선출직은 한 번에 훅 간다. 예전에 경기도지사가 “나 경기도지사에요”라고 말하고 그 이후로 사라졌다. 재벌들
요즘 발생하는 사건 사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마디로 정리된다. 돈과 인성이다. 동양사상은 삶을 두 가지 축으로 본다. 돈과 명예다. 명예를 추구하는 시대와 돈을 추구하는 시대가 순환한다. ‘폼생폼사 ;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던 시대가 ‘명예의 시대’였다. ‘냉수 먹고도 이를 쑤신다’는 속담의 시대다. 어찌 보면 허세로 보이지만 도덕과 양심이 지배하는 정신이 건강한 사회이기도 하다. 돈(재;財)의 시대는 모든 것에서 돈이 우선한다. 돈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순기능을 하면 재생관(財生官)으로 명예를 살린다. 예를 들면 학자금은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킨다. 남을 돕는데 사용된 돈은 자신의 명예를 높인다. 반면 돈을 벌기 위해 인성을 버리면 역기능이다. 즉, 돈(재:財)이 인성을 극하는 것으로 재극인(財剋印)이다. 인성이 무너지면 명예가 실추된다. 이런 돈의 시대와 인성의 시대는 순환을 하며, 지금은 ‘돈의 시대’다. 돈의 시대는 인성이 무너진 때이다. 돈의 가치가 인성의 가치보다 높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의 내면을 보면, 돈 아니면 무너진 인성 때문이다. 후안무치한 정치인이나 관료, 아동학대, 학폭, 성폭력, 사악한 드라마 등은 인성이 무
최근 들어 두 가지 사건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아동학대와 학생폭력(학폭)이다. 아동학대는 학대를 넘어 살인까지 이어지고, 어린이집에서는 급식에 먹지 못할 것을 넣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차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아이를 가방에 넣고 누르고, 조카가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이모가 물고문하고, 아기가 운다고 아빠가 던지고, 엄마가 전남편이 밉다고 자기 아이를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가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로 유아들이 사망하였다.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자식을 구하던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되었는가. 트로트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가사처럼 굶던 시절에 아이에게 먹이고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던 어머니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불과 60년도 안된 사이에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한편, 학폭은 배구 쌍둥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투를 연상시키며 스포츠계에 만연된 것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두 종류 사건은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힘 있는 가해자가 힘 없는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한 면에서 같다. 가해자가 나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필자도 동의하지만, 60년 전에 존
미얀마에서 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아웅산 수지가 구금되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녀는 민주투사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음에도 정권을 잡고 소수인종을 탄압하여 비난을 받던 인물이다. 그녀가 변할 것과 변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부분이 아쉽다. 영국 속담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모 개그맨은 ‘일찍 일어나는 새는 피곤하다’고 빗대어 말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저자 쉘 실버스타인은 「일찍 일어나는 새」라는 시에서 벌레의 입장을 말했다. “만일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 이 시는 통찰을 이야기한다. 새와 벌레란 신분이 아닌 상황에 대한 통찰이다. 벌레를 먹는 새는 작은 새이다. 벌레를 먹지 않는 큰 새를 만나면 작은 새가 벌레 입장이 된다. 이 속담은 ‘그러나 큰 새에게 빨리 잡힐 수도 있다’는 다음 문구가 빠져 있다. 이 속담은 게으르지 말라는 교훈을 담았다. 우리나라 속담엔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고 하였다. 이 두 속담의 차이는 유효기간이 다르다. 우리 속담은 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효력을 상실한다. 통찰이다. 교훈
춤이나 운동이나 몸을 사용하는 것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중심 잡기이다. 모든 춤은 단전을 잡아당겨 힘을 모으며 시작된다. 단전이 춤의 코어가 되어 어떤 동작도 컨트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이나 성악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첫걸음을 걷기 위하여 수만 번 넘어지는 것도 중심잡기를 터득하기 위한 과정이다. 몸뿐만이 아니다. 사상, 철학, 마음, 생각, 인간관계와 같은 모든 것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처음 시작이다. 하지만 오래 시간이 지나거나 초심을 잃거나 생각 없이 살다보면 중심을 잃고 대세에 휩싸이는 경우가 생긴다. 요즘 시대는 중심잡고 살기에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다. 매일 새로 발생한 코로나 감염자 수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건물의 출입구에서 체온측정을 해야 한다. 치과에서도 내원하는 모든 사람을 체온측정하고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모두가 잠정적 보균자로 의심받는 상황이다. 뉴스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드라마는 경쟁적으로 사악해졌다. 부동산과 주식은 광기로 끝이 없을 것처럼 오르고,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빚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런 시대 환경 속에서 스스로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럴 때 필자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미분과
치과에 출근하던 원장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30대 남성에게 폭행을 당하는 영상을 보면서 참담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가해자 문제인가? 치과의사 문제인가? 치과계 문제인가? 사회문제인가? 확실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요소가 만나서 발생하게 된다. 한 가지 현상이 반복해서 나타날 때는 우연보다는 필연적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높다. 즉 동일조건이 되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건의 원인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늘 사회 환경, 가해자, 피해자인 3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현시점에서 나타나는 거시적인 사회 환경을 보아야 한다. 표창장 위조 사건을 시작으로 사회 자체가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가 흔들렸다. 벼룩을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웠다. 최근엔 정인이 사건을 포함해 아동학대에 의한 사망 사건이 증가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외부출입이 적어지고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스트레스를 약한 자에게 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가정폭력이나 이혼이 급증할 가능성도 높다. 정부가 코로나로 인해 양적완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