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으로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비유하기도 하고,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한 번 밝게 타오르고 꺼지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참선 수행 중에 밖으로 향한 마음을 내면으로 돌이켜서 다시 돌아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됐다는 뉴스와 함께 다시 기승을 부린다. 우리나라도 이번 주에 하루 확진자가 1,000명을 넘는 단계에 들어왔다. 최근 이런저런 뉴스를 듣다가 문득 회광반조란 단어가 떠올랐다. 새벽이 오기 직전 밤이 가장 어둡고, 촛불은 꺼지기 직전 가장 밝다. 모두가 앞만 보고 있을 때 뒤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시험은 내가 잘 보는 것보다 남이 못 보았을 때가 더 중요함을 아는 것이 회광반조이다. 정말 옳다고 판단했을 때가 멈추고 되돌아볼 때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낄 때 뒤로 돌면 된다는 뜻이다. 2020(경자)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보이는 사건들이 회광반조 같다. 지난 경자년을 뒤돌아보니 ‘마스크와 코로나’로 두 단어만 기억이 남는다. 지구 모든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 위협 속에서 한 해를 지냈다. 지금 상황이 나쁜 것은 바이러스로부터
한두 달 전쯤 MS사에서 원도우10 업데이트를 강행하고부터 컴퓨터를 켜면 어제 보았던 웹사이트가 저절로 켜진다. 그때마다 잠깐 놀란다. 필자 컴퓨터는 집이든 병원이든 모든 사람이 비밀번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보았던 사이트나 쇼핑 내력 혹은 게임 등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자주 이용하는 것을 기억했다가 빠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알고리즘 기법을 개인 컴퓨터까지 적용시킨 듯하다. 얼마 전 스마트폰 인터넷 뉴스 기사에 대해 지인과 대화를 할 때 일이다. 본인 스마트폰에서 구글 뉴스에 뜬 것이니 필자도 열어보면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필자는 스마트폰 구글 뉴스에 뜨는 기사는 사람마다 취향에 맞춰 나타나기 때문에 모두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개인이 검색한 기록과 열어본 기사를 기억해 알고리즘이 유사한 기사들을 검색, 우선순위로 배정해 보여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스마트폰 뉴스 기사 배열이 다르며 검색해주는 것도 다르다. 디지털 뉴스가 종이 신문처럼 일률적이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상품 하나 검색해도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배너광고로 끊임없이 보여준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중단하고 다시 시작
얼마전 코로나19 확진자가 300명을 선회하면서 수도권이 대응 2단계로 들어섰다. 올해도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늘 이맘때면 ‘다사다난한 지난 한 해’란 표현을 쓰지만 올해는 그저 단순하게 코로나19로 시작해서 코로나19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은 연말까지 2단계에 준한다고 하여 해마다 있는 송년회가 거의 취소되었다. 덕분에(?) 퇴근하고 늘 집으로 돌아오는 건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 꾸준히 운동도 가능하고 책 읽고 음악 들을 시간도 생겼다. 필자는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즐기지만 젊고 혈기왕성한 사람들은 힘들 것이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아지기 때문에 해소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쉽게 운동 부족이나 우울해지므로 스스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 몸이 만족되면 우울해질 가능성은 많이 감소된다. 100m를 전력 질주해 숨이 턱까지 차면 숨 쉬는 것 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이치이다. 필자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이따금 올라오는 시대 우울을 해소한다. 얼마 전부터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자전거 용품을 하나씩 비교하면서 고르고 주문하며 소일하
요즘 세간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집필하신 스님이 좋은 집에서 사는 모습으로 방송에 나가고부터 ‘무소유’를 쓰신 법정스님과 비교되어 ‘풀소유’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에 선승이셨던 숭산스님의 외국인 제자인 스님이 비난을 하다가 전화통화 후에 다시 칭찬을 하며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불교적 개념에서 보면 두 사건은 하나도 논란이 되지 않는, 의미 없는 일이다. 우선 ‘풀소유’의 반대가 ‘무소유’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은 ‘무소유(無所有)’를 한자로 해석하여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 무소유란 수행 단계 중 하나이다. 수행 단계가 9가지가 있으며, 그중 8번째 단계를 ‘무소유처’라고 부르며 ‘무한의식을 뛰어넘어 아무것도 없는 경지’라고 한다. 법정스님이 책 제목을 여기서 따오며,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행으로 소유하지 않는 기본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인 듯하다. 불교의 기본개념은 ‘중도’로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이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중도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선은 당연한 기본이기 때문이다. 선하면 악을 이해하고 비로소 ‘중도’에
동서양을 통틀어 많은 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알고자 무척 노력하였다. 서양철학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알고자 노력했고, 동양은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전제하에 마음과 생각 관계를 연구했다. 서양은 몸과 마음의 연결성을 중시해 옳은 행동을 강조함으로써 정의가 사회규범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지만, 생각은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옳은 생각이 사회규범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서양이 결과 중심적이라면, 동양은 원인 중심적 사고를 하였다. 예를 들어 생일 케이크를 안 가져온 남편과 부부싸움을 할 때, 서양은 케이크를 안 가져온 사실로 싸움을 하고, 동양은 성의 없음(마음이 담겨 있지 않음)으로 싸움을 한다. 마음 중심인 동양인은 기러기 아빠를 이해할 수 있지만, ‘out of sight, out of mind’인 서양에서 long distance는 마음도 먼 것이기 때문에 기러기 가족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동양에서 더 깊은 연구가 있었다. 고전인 심경부주(心經附註)에서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었다. 인심이란 사람의 마음으로 좋아하고, 즐기고, 성내고, 욕심내는 인간적인 모든 마음을 말한다. 도심(道心)이란
지난 일요일 산책에서 아파트 주변과 가로수 그리고 한강공원에 한창 단풍이 아름다웠다. 어제 운동 갔을 때는 낙엽이 많아 나뭇가지가 보이고 스산한 겨울 느낌이 났다. 단풍을 보면 아름다움으로 감탄하고, 곧 사라질 풍경에 아쉽고, 단풍이 주는 의미로 삶을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나뭇잎 색이 변하여 단풍이 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봄여름 동안 성장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엽록소가 가을을 지나며 겨울준비로 사라지면서 본래부터 내재돼 있던 나뭇잎 색이 나타나는 것이 단풍이다. 나무마다 자신에 맞고 필요한 색소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색에 차이가 있다. 한 집안에서 가장도 자신이 일을 해야 하는 때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접고 참으며 열심히 일하고, 은퇴하여 자신이 지닌 내재된 취미와 장기를 찾는 것이 단풍의 모습과 유사하다. 성장기에는 모든 나무가 획일적인 푸른색이고 마무리 시기에는 다양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자연 이치다. 단풍을 보며 필자도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르지 않음을 생각한다. 글을 쓰는 오늘은 11월 4일로 광주 무등산 단풍 절정기다. 추분이 지나면 금강산을 시작으로 단풍이 남하하여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속리산을 지나 내장
요즘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말이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교훈에 정반대되는 말이다. 나뭇가지 한 개씩은 부러트리기 쉽지만 여러 개는 어렵다는 교육 내용이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렸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 명제였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사회적 대전제였던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적정거리 유지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로 바뀌며 미덕이 되었다. 승강기를 탈 때도 사람이 몇 명 정도 모이면 기다렸다가 다음에 탄다. 커피숍이나 음식점에도 사회적 거리두기 좌석이 있다. 백화점이나 쇼핑타운 매장은 인원 제한을 하고 밖에서 거리두기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10명 이상 모이는 모임은 줄어들었고 친한 사람간 소단위 모임으로 변했다. 결혼식과 장례식도 간소화되는 추세로 참석하지 않아도 흠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생활이 근 1년 정도 되다 보니 조금씩 적응돼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1m가 개인 간 거리로 익숙해지다 보면 코로나 시대가 끝나서까지도 유지되어 북적되는 상황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커피숍이나 음식점에서 중간자리가 비어있으니 조용
아침에 일어나니 팔과 어깨가 뻐근하다. 노동(?) 때문이다. 1년 전부터 아침식사 대용으로 고구마를 먹기 시작하였다. 한번 쪄서 냉동실에 얼려놓고 아침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다. 구입은 마트나 인터넷 주문을 하는데 이번에 햇고구마가 나왔다고 해남에 계신 처형이 보내주셨다. 큰손 덕택에 10kg 두 박스를 받고 어제 반 박스를 작업(?)하였다. 흙이 묻은 고구마를 일차적으로 씻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다시 수세미로 깨끗이 닦는데 몇 개 하지도 않고 팔이 아파 왔다. 씻어놓은 것보다 씻어야 할 양이 산처럼 보이고,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땀이 나고 팔은 점점 더 아파졌지만 씻은 양은 많지 않고 씻어야 할 것은 점점 더 많아 보였다. 순간 가사 노동, 일반 노동, 막노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꼈다. 식당에서 그릇 닦는 분들, 막노동 현장에서 노동하시는 분들, 동일 작업 노동을 하는 분들이 생각났다. 큰 식당들은 분야별로 나뉘어있다. 홀에 서빙, 주방에 요리사, 그리고 그릇 씻는 역할이 구분돼 있어 설거지 담당은 하루 종일 그릇만 씻는다. 특히 불판을 쓰는 음식점에서 탄 불판을 씻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신사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얼마 전 중2 남학생이 엄마와 함께 내원하였다. 중2 아들은 상담실에 들어오면서부터 의자에 앉을 때까지 심드렁한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영혼 없는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비딱하게 앉고는 시종일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주소를 물으니 엄마가 열심히 설명하였다. 치료는 발치 교정이 필요하고 심한 과개교합으로 치료 기간이 2년이 조금 더 걸릴 수 있다고 설명하고 나서 끝자락에 엄마에게 한 가지 질문하였다. 아들이 이제 곧 중3이 되고 교정이 2년 이상 걸리면 고1이 넘어서까지 장치를 붙이고 있어야 하는데 혹시 아들과 상의해 보았는지 물었다. 엄마는 누나가 중2 때 교정을 해서 아들도 지금 데리고 왔다고 답했다. 이에 “어머니, 여학생과 남학생은 다릅니다. 여학생은 자신이 원해서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수 있지만, 아들이 원하지 않을 때는 부모님의 강압적인 요구로 고등학교 시절에 교정장치를 붙이고 있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일단 아들과 상의하는 것이 먼저일 듯합니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한 번도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서 장치를 붙이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아들은 시종일관 영혼 없는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댄
2016년 브래드피트가 주연한 영화 ‘빅 쇼트’는 “It ain't what you don't know that gets you into trouble. It's what you know for sure that just ain't so. -Mark Twain-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이란 자막으로 시작된다. 2008년 미국 부동산 버블사태가 발생할 당시가 배경이다. 부동산에 대한 사회 전체 집단적인 믿음이 착각으로 거품이 터질 때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었다. 감독은 마크 트웨인의 명언을 빌려 처음부터 자막으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였다. 최근 매스컴에서 ‘영끌’이란 신조어가 자주 보인다. ‘영혼까지 끌어와서 빚을 낸다’는 준말이 ‘영끌’이다. 필자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두 가지 생각에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우선 ‘영혼까지 끌어온다’는 표현이 마치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는 말처럼 들린다. 영혼을 파는 것은 중국괴담에서 복수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경우가 있었고, 우리나라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고, 서양에서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영끌’이란 단어를 접
내년 1월 1일부터 비급여 진료가격을 개설자(원장)가 ‘직접’ 환자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으로 의료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사악한 악법’이다. 현실 무시를 넘어 적어도 자신은 장사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있는 선량한 의료인의 자존심을 짓밟는 악법이다. 환자와 의사는 돈이 매개가 아니다. 질환이 매개이고 그에 따른 결과가 돈이다. 의사는 돈을 벌기 위해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아니고 진료를 하니 돈이 들어오는 개념이다. 돈을 벌기 위해 진료를 한다면, 불법이 아니면 무슨 짓을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의료를 천직으로 알고 자긍심을 지닌 이들에게 이 개정은 악법 중의 악법이다. 환자에게 원장 스스로 비급여 가격을 직접 설명하게 하는 것은 경술국치 때 일본이 한국인에게 강제로 신사 참배를 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환자에게는 의사가 직접 치료비를 말하지 않는 것은 그동안의 자존심이었다. 이것은 옛날부터 훌륭한 서당 훈장님과 의원은 수업료와 치료비를 형편대로 받는 것이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수업료를 낼 때가 되면 부모님이 형편에 맞춰 쌀이든 보리든 호박이든 문 앞에 놓고 갔었다. 악덕 의원이 아니라면 일단 먼저 약을 주고 나
요즘 덴탈마스크가 귀한 몸이 되었다. 치과의사는 마스크에 익숙하지만 일반인들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그나마 한국인들은 황사 덕분(?)에 마스크에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반면 서양인들은 마스크에 심한 거부감이 있다는 것을 코로나 사태를 통해 보면서 문화적 차이가 큰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 왜 그들은 마스크에 대해 그리도 심하게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분석들이 있다. 서양에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법으로 금지시킨 나라가 많다는 이유도 있다. 환자들만 사용한다는 인식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사람을 볼 때 동양은 눈을 먼저 보지만 서양은 입을 먼저 본다는 주장도 있다. 마스크를 안 쓸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서양 영화에서 공포나 스릴러물 혹은 범죄물에서 범인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마스크가 공포의 상징이거나 범죄와 연관된 이미지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필자는 오래된 문화와 철학적 사고 차이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동양은 외향보다 내면을 중시하고 서양은 반대였다. 동양에서는 Yes와 No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부모님의 “괜찮다”라는 말이 반대를 의미하는 경우도 많다. 말하는
태풍 ‘마이삭’이 또 올라오고 있다. 아침에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여니 메일 한 통이 들어와 있다. 유학 시절 같이 공부한 치과교정과 일본 동기로부터 강한 태풍이 한국을 또 지나가는데 별일 없기를 바란다는 안부 메일이었다. 아마도 뉴스에서 이번 태풍이 매우 강하다고 들은 모양이다. 유학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걱정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맙다. 지난번 태풍 ‘바비’ 때 일이다. 태풍 영향권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야간진료를 좀 일찍 마치고 귀가를 서둘렀다. 늘 비어있던 지하 2층 주차장을 내려가니 이미 태풍을 피하기 위한 차들로 거의 만차였고 대여섯 군데 빈 곳이 보였다. 그런데 빈 주차 공간마다 차선을 침범한 차로 주차는 어려운 상태였다. 겨우 주차하고 뒤돌아 나오는 데 주차는 하기 어려운 여러 빈 곳이 보여 씁쓸했다. 순간 세 가지 이유가 생각났다. 우선 화장실이 매우 급해 대충 주차하고 잊어버린 경우다. 필자가 믿고 싶은 가능성이다. 다른 경우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지 못하고 평소에 하던 대로 했든지 아니면 그대로 그냥 방치한 경우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은 옆에 차가 있으면 승하차가 불편하고 자신의 차에 흠집을 낼 것이 싫어서 타인의 주
아침에 출근해 옷을 갈아입는데 벽에 무엇인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말벌이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병원 창문을 열어두면 많은 동물이 날아들어 온다. 여름밤이면 하루살이들이 불빛을 보고 날아들어 문 열기가 어렵다. 이따금 새도 들어온다. 참새, 비둘기, 이름 모를 새도 있었다. 한 번은 몇 시간을 나가지 못해 119를 부른 적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불청객이 말벌이다. 방충제를 준비하고 파리채로 한방에 잡아야 했다. 놓치고 날아다니면 직원이나 환자에게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꿀벌이라면 죽이지 않고 나갈 때까지 기다려도 되는데…”라는 필자의 말에 한 직원이 “뭐가 다른데요?”라고 반문했다. “많이 다르지요”라고 답하고 꿀벌과 말벌의 차이와 방치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선 가장 큰 차이는 독침 모양이다. 꿀벌은 갈고리 모양이라서 침을 쏘면 뺄 수가 없고 침과 내장이 연결돼있어서 빼는 순간 죽는다. 반면 말벌은 바늘 모양으로 반복해 찌르는 것이 가능하다. 꿀벌은 목숨을 걸고 찔러야 하기 때문에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반면 말벌은 공격성이 강하다. 물론 먹이도 다르다. 꿀벌은 새끼들에게 꽃가루를 공급하지만 말벌은 벌레를 공급해준다. 종종 보
건강검진 결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아졌다. 먹는 것에 대한 검토를 하고 즐겨 마시던 믹스커피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식후에 한 잔, 그리고 일하는 도중에 힘들 때마다 쉬면서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적어도 하루에 5~6잔은 마신 듯하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중단했는데 식후에 늘 마시던 것을 끊으니 금단증상이 나타났다. 처음 나타난 증상은 불안증이다. 뭔지 모르지만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아메리카노 혹은 향이 강한 차로 대치해 봤지만 믹스커피의 단맛은 흉내 낼 수 없었다. 단맛에 길들여진 혀끝은 끊임없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단맛을 찾도록 유혹했다. 다음으로 짜증이 나타났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 같은 단순한 그런 짜증이었다. 다음으로 우울감이 왔다. 매사에 의욕이 사라지고 무력감이 나타났다. 결국 무작정 참는 것보다 변화를 주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혀와 뇌에 믹스커피와 유사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을 찾았다. 믹스커피는 커피의 깔끔함과 단맛을 지니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식후에 일단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단맛은 고구마로 대체했다. 아메리카노와 고구마라는 잘 어울리지 않을 듯한 조합이 효과를 나타냈다. 식후에 나타나던 믹스커피 생각이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