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서 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아웅산 수지가 구금되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녀는 민주투사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음에도 정권을 잡고 소수인종을 탄압하여 비난을 받던 인물이다. 그녀가 변할 것과 변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부분이 아쉽다. 영국 속담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모 개그맨은 ‘일찍 일어나는 새는 피곤하다’고 빗대어 말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저자 쉘 실버스타인은 「일찍 일어나는 새」라는 시에서 벌레의 입장을 말했다. “만일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 이 시는 통찰을 이야기한다. 새와 벌레란 신분이 아닌 상황에 대한 통찰이다. 벌레를 먹는 새는 작은 새이다. 벌레를 먹지 않는 큰 새를 만나면 작은 새가 벌레 입장이 된다. 이 속담은 ‘그러나 큰 새에게 빨리 잡힐 수도 있다’는 다음 문구가 빠져 있다. 이 속담은 게으르지 말라는 교훈을 담았다. 우리나라 속담엔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고 하였다. 이 두 속담의 차이는 유효기간이 다르다. 우리 속담은 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효력을 상실한다. 통찰이다. 교훈
춤이나 운동이나 몸을 사용하는 것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중심 잡기이다. 모든 춤은 단전을 잡아당겨 힘을 모으며 시작된다. 단전이 춤의 코어가 되어 어떤 동작도 컨트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이나 성악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첫걸음을 걷기 위하여 수만 번 넘어지는 것도 중심잡기를 터득하기 위한 과정이다. 몸뿐만이 아니다. 사상, 철학, 마음, 생각, 인간관계와 같은 모든 것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처음 시작이다. 하지만 오래 시간이 지나거나 초심을 잃거나 생각 없이 살다보면 중심을 잃고 대세에 휩싸이는 경우가 생긴다. 요즘 시대는 중심잡고 살기에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다. 매일 새로 발생한 코로나 감염자 수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건물의 출입구에서 체온측정을 해야 한다. 치과에서도 내원하는 모든 사람을 체온측정하고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모두가 잠정적 보균자로 의심받는 상황이다. 뉴스는 갈수록 험악해지고, 드라마는 경쟁적으로 사악해졌다. 부동산과 주식은 광기로 끝이 없을 것처럼 오르고,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빚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런 시대 환경 속에서 스스로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럴 때 필자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미분과
치과에 출근하던 원장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30대 남성에게 폭행을 당하는 영상을 보면서 참담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가해자 문제인가? 치과의사 문제인가? 치과계 문제인가? 사회문제인가? 확실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요소가 만나서 발생하게 된다. 한 가지 현상이 반복해서 나타날 때는 우연보다는 필연적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높다. 즉 동일조건이 되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건의 원인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늘 사회 환경, 가해자, 피해자인 3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현시점에서 나타나는 거시적인 사회 환경을 보아야 한다. 표창장 위조 사건을 시작으로 사회 자체가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가 흔들렸다. 벼룩을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웠다. 최근엔 정인이 사건을 포함해 아동학대에 의한 사망 사건이 증가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외부출입이 적어지고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스트레스를 약한 자에게 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가정폭력이나 이혼이 급증할 가능성도 높다. 정부가 코로나로 인해 양적완화정
이 글로 심리학 이야기를 쓴 지 500회째다. 처음 시작할 때 3개월 정도 예상하고 시작한 것이 어느덧 500회가 되었다. 기간으로 10년이 넘은 듯하다. 글 한 편을 쓰는 데 3시간 정도 잡으면 1,500시간 정도다. 대략 62일을 꼬박 글을 쓴 셈이 된다. 처음부터 10년을 쓰라고 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세상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그냥 한 주, 한 주를 쓰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조금씩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깨닫게 한다. 인도에서 누군가 삽 하나로 오랜 세월을 행하여 산을 가로지르는 통학 길을 만들었다. ‘멈추지 않으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을 새삼 다시 생각해본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에는 마감을 맞추고 주제를 생각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주 수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주제는 평소 생활을 하며 문득 떠오르는 때에 스마트폰에 적어 놓는다. 필자가 갤쫛시노트를 쓰는 유일한 이유다. 500회를 맞이하여 그동안 애정을 갖고 읽어주시고 피드백해 주신 독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문자를 주시기도 하고, 전화를 주
70대 환자분이 내원하셨다. 집 근처 치과에서 임플란트를 한 다음 날부터 걸을 때 다리도 아프고 씹는 것도 이상하고 불편한 느낌인데, 치료해준 의사는 이상이 없다는 말만 한다고 불평하셨다. 교합과 유도로 등을 확인했지만 특별한 문제점이 없었다. 단, 턱기능을 검진하는 동안에 대답을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힘을 주고 입을 벌리고 닫는데도 턱이 덜덜 떨리는 양상이었다. 치과 치료를 받은 시간이 어느 정도 되냐고 물으니 30분이 넘었다고 하셨다. 필자는 “임플란트나 교합에는 문제없이 잘 치료되었습니다. 다만 치료를 오랜 시간 받는 동안에 긴장하고 힘을 쓰셔서 다음날 온몸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옛날 말에 이 빼고 몸살 났다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차차 좋아지실 것이니 살살 조심해서 사용하시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마음 편해하며 가셨다. ‘이몸살’이란 필자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환자가 치료가 잘못됐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의사가 알 수 없는 증상들도 많고, 환자들이 자신 생각 속에 몰입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좀 더 진전되면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게 되고 치료해준 의사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물론 환자도 의도적
신축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맞지만 올해는 지난해의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는 이유로 여전히 어렵고 힘들게 시작되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새해는 새롭게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그리 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이치입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코로나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으니 코로나 또한 새해에는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홍수가 지나가고 나면 흔적이 남듯이 코로나가 지나고 나면 그 후유증이 다양한 형태로 남을 것이니 이에 대처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할 것이 예상되기도 합니다. 100m 전력질주 가 끝나면 앉아서 쉬는 것이 다음 순서입니다. 지난 경자년은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견디며 전력으로 버텼으니, 신축년에는 버티기를 멈추는 해이길 바랍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가장 진한 어둠도 여린 여명에 사라집니다. 그런 믿음으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신축은 12간지로 보면 하얀 소의 해입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동물이 소입니다. 다만, 소 자신은 모든 것을 희생하여 타인을 이롭게 하는 동물입니다. 동양철학 면에서 보면 신축(辛丑)은 오행으로 금(金)에 해당되며 의미는 결과입니다. 오랜 세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12월 21일)은 동지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평생 할 일을 다 한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아마도 평생 들을 트로트 노래를 다 들었고 평생 쓸 마스크를 다 쓴 듯하다. 일 년 내내 TV에서는 트로트가 아니면 코로나 이야기뿐이었다. 며칠 전 트로트 경연 대회에서 어린 출연자가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 가사 중에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란 구절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노래 가사 때문인지 왠지 동지라는 단어는 북풍한설의 눈보라를 연상하게 한다. 노래 가사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 북쪽 유일한 외곽도로인 돈암동 미아리고개에서 1.4후퇴 때 피랍되던 가족들과 작별을 하던 장면을 묘사하였다. 그런 이유인지 전쟁 이후부터는 늘 동지는 추위와 배고픔의 상징처럼 되었다. 하지만 전쟁 그 이전에는 의미가 달랐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동지는 정월대보름과 같은 느낌의 명절이었다. 가장 풍요로운 추석이 지나고 마지막 겨울 준비인 김장까지 모두 끝나서 한 해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새경도 받았고 먹거리도 넉넉한 때이며, 봄이 올 때까지 쉴 수 있는 일종의 휴가가 시작되는 기쁜 날이었다. 양식이 모두 떨어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으로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비유하기도 하고,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한 번 밝게 타오르고 꺼지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참선 수행 중에 밖으로 향한 마음을 내면으로 돌이켜서 다시 돌아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됐다는 뉴스와 함께 다시 기승을 부린다. 우리나라도 이번 주에 하루 확진자가 1,000명을 넘는 단계에 들어왔다. 최근 이런저런 뉴스를 듣다가 문득 회광반조란 단어가 떠올랐다. 새벽이 오기 직전 밤이 가장 어둡고, 촛불은 꺼지기 직전 가장 밝다. 모두가 앞만 보고 있을 때 뒤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시험은 내가 잘 보는 것보다 남이 못 보았을 때가 더 중요함을 아는 것이 회광반조이다. 정말 옳다고 판단했을 때가 멈추고 되돌아볼 때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낄 때 뒤로 돌면 된다는 뜻이다. 2020(경자)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보이는 사건들이 회광반조 같다. 지난 경자년을 뒤돌아보니 ‘마스크와 코로나’로 두 단어만 기억이 남는다. 지구 모든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 위협 속에서 한 해를 지냈다. 지금 상황이 나쁜 것은 바이러스로부터
한두 달 전쯤 MS사에서 원도우10 업데이트를 강행하고부터 컴퓨터를 켜면 어제 보았던 웹사이트가 저절로 켜진다. 그때마다 잠깐 놀란다. 필자 컴퓨터는 집이든 병원이든 모든 사람이 비밀번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보았던 사이트나 쇼핑 내력 혹은 게임 등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자주 이용하는 것을 기억했다가 빠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알고리즘 기법을 개인 컴퓨터까지 적용시킨 듯하다. 얼마 전 스마트폰 인터넷 뉴스 기사에 대해 지인과 대화를 할 때 일이다. 본인 스마트폰에서 구글 뉴스에 뜬 것이니 필자도 열어보면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필자는 스마트폰 구글 뉴스에 뜨는 기사는 사람마다 취향에 맞춰 나타나기 때문에 모두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개인이 검색한 기록과 열어본 기사를 기억해 알고리즘이 유사한 기사들을 검색, 우선순위로 배정해 보여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스마트폰 뉴스 기사 배열이 다르며 검색해주는 것도 다르다. 디지털 뉴스가 종이 신문처럼 일률적이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상품 하나 검색해도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배너광고로 끊임없이 보여준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중단하고 다시 시작
얼마전 코로나19 확진자가 300명을 선회하면서 수도권이 대응 2단계로 들어섰다. 올해도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늘 이맘때면 ‘다사다난한 지난 한 해’란 표현을 쓰지만 올해는 그저 단순하게 코로나19로 시작해서 코로나19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은 연말까지 2단계에 준한다고 하여 해마다 있는 송년회가 거의 취소되었다. 덕분에(?) 퇴근하고 늘 집으로 돌아오는 건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 꾸준히 운동도 가능하고 책 읽고 음악 들을 시간도 생겼다. 필자는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즐기지만 젊고 혈기왕성한 사람들은 힘들 것이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아지기 때문에 해소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쉽게 운동 부족이나 우울해지므로 스스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 몸이 만족되면 우울해질 가능성은 많이 감소된다. 100m를 전력 질주해 숨이 턱까지 차면 숨 쉬는 것 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이치이다. 필자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이따금 올라오는 시대 우울을 해소한다. 얼마 전부터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자전거 용품을 하나씩 비교하면서 고르고 주문하며 소일하
요즘 세간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집필하신 스님이 좋은 집에서 사는 모습으로 방송에 나가고부터 ‘무소유’를 쓰신 법정스님과 비교되어 ‘풀소유’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에 선승이셨던 숭산스님의 외국인 제자인 스님이 비난을 하다가 전화통화 후에 다시 칭찬을 하며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불교적 개념에서 보면 두 사건은 하나도 논란이 되지 않는, 의미 없는 일이다. 우선 ‘풀소유’의 반대가 ‘무소유’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은 ‘무소유(無所有)’를 한자로 해석하여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 무소유란 수행 단계 중 하나이다. 수행 단계가 9가지가 있으며, 그중 8번째 단계를 ‘무소유처’라고 부르며 ‘무한의식을 뛰어넘어 아무것도 없는 경지’라고 한다. 법정스님이 책 제목을 여기서 따오며,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행으로 소유하지 않는 기본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인 듯하다. 불교의 기본개념은 ‘중도’로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이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중도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선은 당연한 기본이기 때문이다. 선하면 악을 이해하고 비로소 ‘중도’에
동서양을 통틀어 많은 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알고자 무척 노력하였다. 서양철학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알고자 노력했고, 동양은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전제하에 마음과 생각 관계를 연구했다. 서양은 몸과 마음의 연결성을 중시해 옳은 행동을 강조함으로써 정의가 사회규범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지만, 생각은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옳은 생각이 사회규범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서양이 결과 중심적이라면, 동양은 원인 중심적 사고를 하였다. 예를 들어 생일 케이크를 안 가져온 남편과 부부싸움을 할 때, 서양은 케이크를 안 가져온 사실로 싸움을 하고, 동양은 성의 없음(마음이 담겨 있지 않음)으로 싸움을 한다. 마음 중심인 동양인은 기러기 아빠를 이해할 수 있지만, ‘out of sight, out of mind’인 서양에서 long distance는 마음도 먼 것이기 때문에 기러기 가족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동양에서 더 깊은 연구가 있었다. 고전인 심경부주(心經附註)에서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었다. 인심이란 사람의 마음으로 좋아하고, 즐기고, 성내고, 욕심내는 인간적인 모든 마음을 말한다. 도심(道心)이란
지난 일요일 산책에서 아파트 주변과 가로수 그리고 한강공원에 한창 단풍이 아름다웠다. 어제 운동 갔을 때는 낙엽이 많아 나뭇가지가 보이고 스산한 겨울 느낌이 났다. 단풍을 보면 아름다움으로 감탄하고, 곧 사라질 풍경에 아쉽고, 단풍이 주는 의미로 삶을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나뭇잎 색이 변하여 단풍이 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봄여름 동안 성장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엽록소가 가을을 지나며 겨울준비로 사라지면서 본래부터 내재돼 있던 나뭇잎 색이 나타나는 것이 단풍이다. 나무마다 자신에 맞고 필요한 색소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색에 차이가 있다. 한 집안에서 가장도 자신이 일을 해야 하는 때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접고 참으며 열심히 일하고, 은퇴하여 자신이 지닌 내재된 취미와 장기를 찾는 것이 단풍의 모습과 유사하다. 성장기에는 모든 나무가 획일적인 푸른색이고 마무리 시기에는 다양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자연 이치다. 단풍을 보며 필자도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르지 않음을 생각한다. 글을 쓰는 오늘은 11월 4일로 광주 무등산 단풍 절정기다. 추분이 지나면 금강산을 시작으로 단풍이 남하하여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속리산을 지나 내장
요즘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말이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교훈에 정반대되는 말이다. 나뭇가지 한 개씩은 부러트리기 쉽지만 여러 개는 어렵다는 교육 내용이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렸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 명제였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사회적 대전제였던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적정거리 유지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로 바뀌며 미덕이 되었다. 승강기를 탈 때도 사람이 몇 명 정도 모이면 기다렸다가 다음에 탄다. 커피숍이나 음식점에도 사회적 거리두기 좌석이 있다. 백화점이나 쇼핑타운 매장은 인원 제한을 하고 밖에서 거리두기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10명 이상 모이는 모임은 줄어들었고 친한 사람간 소단위 모임으로 변했다. 결혼식과 장례식도 간소화되는 추세로 참석하지 않아도 흠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생활이 근 1년 정도 되다 보니 조금씩 적응돼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1m가 개인 간 거리로 익숙해지다 보면 코로나 시대가 끝나서까지도 유지되어 북적되는 상황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커피숍이나 음식점에서 중간자리가 비어있으니 조용
아침에 일어나니 팔과 어깨가 뻐근하다. 노동(?) 때문이다. 1년 전부터 아침식사 대용으로 고구마를 먹기 시작하였다. 한번 쪄서 냉동실에 얼려놓고 아침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다. 구입은 마트나 인터넷 주문을 하는데 이번에 햇고구마가 나왔다고 해남에 계신 처형이 보내주셨다. 큰손 덕택에 10kg 두 박스를 받고 어제 반 박스를 작업(?)하였다. 흙이 묻은 고구마를 일차적으로 씻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다시 수세미로 깨끗이 닦는데 몇 개 하지도 않고 팔이 아파 왔다. 씻어놓은 것보다 씻어야 할 양이 산처럼 보이고,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땀이 나고 팔은 점점 더 아파졌지만 씻은 양은 많지 않고 씻어야 할 것은 점점 더 많아 보였다. 순간 가사 노동, 일반 노동, 막노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꼈다. 식당에서 그릇 닦는 분들, 막노동 현장에서 노동하시는 분들, 동일 작업 노동을 하는 분들이 생각났다. 큰 식당들은 분야별로 나뉘어있다. 홀에 서빙, 주방에 요리사, 그리고 그릇 씻는 역할이 구분돼 있어 설거지 담당은 하루 종일 그릇만 씻는다. 특히 불판을 쓰는 음식점에서 탄 불판을 씻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신사들도 마찬가지다.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