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신덕재 선배님의 영전에 글을 올립니다.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는 소식에 노심초사하던 사이 선배님이 타계하셨다는 비보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70대 중반이라는 정정한 나이에 뭐가 이리 바쁘게 우리 곁을 떠나셨는지 선배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한 달 전 선배님의 전화에 부리나케 병원으로 찾아뵀던 기억이 납니다. 병상에 누워계신 선배님과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며 평생 해오셨던, 지금도 하고 싶으신 나눔과 봉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배님 면회 후 형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회복이 힘든 상태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날 병원에서의 대화가 마지막이었는데 더 많은 이야기, 더 많은 정을 나누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실향민이신 선배님은 6·25 한국전쟁 때 황해도 옹진 앞바다에서 아버님과 생이별을 하고, 남한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당시 선배님 나이는 불과 다섯 살이셨지요. 한국전쟁 후 가족과 헤어진 실향민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가장 역할을 했고, 지독했던 가난을 이겨내고 서울대치과대학에 입학하셨습니다.
북에 계신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셨을까요? 학창시절 당시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이화여대 등 서울지역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 중심으로 연합의료봉사단체 ‘푸른얼’을 만드셨고, ‘열린치과의사회(現 열린치과봉사회·이하 열치)’, 최근 ‘하나행복나눔봉사회’까지 50년 가까이 북한이탈주민, 노숙자, 이주노동자, 해외 의료봉사 등 선배님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손을 먼저 내미셨지요.
서대문구에서 중앙치과를 개원하셨던 선배님은 1997년 IMF 이후 갑작스러운 실업으로 길거리에 늘어난 노숙자를 보며 안타까워하시다 종잣돈을 마련하시어 1999년 열치를 창립하셨습니다. 노숙자쉼터인 자유의 집에 첫 번째 치과진료소를 만들고, 이후 노인복지센터, 하나원, 중국동포의집, 하나원분원, 충북 예산군 등 여섯 곳이 넘는 크고 작은 진료소를 개소하고 열치 회원들과 진료봉사에 나섰습니다. 기부활동에도 적극적이셨던 선배님은 열치 장학사업은 물론, 남북하나재단에 북한이탈주민 보철 및 치과치료비로 1억원을 전달한데 이어 지난 6일에도 남북하나재단에 추가로 5,000만원의 기부금을 전달하셨지요.
나눔과 봉사를 평생의 ‘업(業)’으로 실천하셨던 선배님은 문학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으셨습니다. 치과계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이기도 하셨던 선배님은 ‘PEN 문학상’에서 네 번째 저서인 소설 ‘바보죽음’으로 상을 받으셨고, 월간 순수문학의 ‘순수문학상 시상식’에서는 그간의 봉사경험을 엮은 수필집 ‘세월을 거슬러 간 여행’으로 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소설이나 수필 초고를 탈고하시면 꼭 저에게 먼저 보내주셔서 “읽어보고 오탈자가 있으면 잡아달라”고 하셨던 선배님. 특히 캄보디아 진료봉사 이야기로 채워진 수필 ‘세월을 거슬러 간 여행’ 출판기념회에서 선배님이 “의료봉사는 여행이다. 봉사의 의미를 세상에 알려 봉사활동을 더욱 북돋고 싶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치과계의 ‘작은 거인’이셨던 신덕재 선배님.
동네치과 원장으로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봉사단체를 만들어 기부하셨던 선배님. 우리 주위의 소외된 이웃과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누구보다 진심이셨던 선배님. 제가 서울시치과의사회장이던 시절 감사로 활동하시면서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항상 회원 눈높이에서 회무를 바라보고 안 되는 일은 안 된다고 따끔하게 지적하셨던 선배님, 제가 회장 시절 가장 믿고 기대었던 선배님, 한 달 전 병원에서 뵀을 때 같이 봉사를 다녔던 회원들이 보고 싶다며 마지막에 창립하셨던 ‘하나행복나눔봉사회’가 우리 사회에 책임감을 갖고 의료봉사에 더욱 매진해주기를 바란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선배님.
늘 치과계의 작은 거인이었던 선배님의 뜻을 이어받아 저희 후배들도 북한이탈주민들의 자립과 성장을 위해 지원하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생전에 고향인 황해도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셨지요? 영면(永眠)에 드시고 이제야 고향으로 훨훨 날아가셨네요. 부디 고향에서 아버님과 못다한 정 나누시길 바랍니다. 이제 이번 생에서 더이상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한없는 아쉬움만 남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