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의 사회성은 문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과 친구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성장한다. 부모나 형제로부터 언어를 배우고, 선생님이나 친구를 통해서 지적, 사회적, 육체적으로 발달한다고 알고 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주위의 모든 것이 성장과 성숙의 기초가 된다. 유아기에는 또래친구를 통해, 소년기에는 주위 환경과 친구를 통해 행동과 사고의 발달이 이뤄진다. 특히 청소년기의 친구는 성장해서 노년기에 이르렀을 때도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래서 어릴 때 친구는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마치 그 옛날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법이다. 본성의 근본을 알기에 의심이나 주저 없이 그 옛날로 돌아가 쉽게 친밀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 사회적으로 만난 친구는 쉽게 자신의 참모습을 내보이기가 쉽지 않고 친구가 쉽게 될 수 없다. 어떠한 특별한 계기로 인해 그의 본성을 알게됐을 때 비로소 어렵게 친구가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의 참본질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소꿉친구와 어울리면서 친구의 가족, 가정까지 알기에 모든 것이 확연히 이해되고, 쉽게 친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시냇물에서 같이 물장구치고, 딱지, 구슬치기를 하며 사립문 열고 뛰어 들어간 친구의 초가집엔 강아지가 뛰놀고, 배고프다하면 한두 가지 반찬에 보리밥 한 그릇, 그리고 김치를 찢어주시던 친구의 부모님.

원두막에서 개구리 우는 여름밤을 같이 보내고 반딧불 잡던 그때 그 시절 친구의 기억들은 고희를 눈앞에 둔 초로의 필자에게 눈물나게 돌아가고 싶은 옛 추억이다. 청소년이 되어 공부하며 친구와 방과 후에 무겁게 느껴졌던 농구공을 가지고 땀 뻘뻘 흘리며 뛰어다녔던 교정, 밤에는 학원가를 누비며 어느 선생이 유명하다고 강의를 받던 그 시절이 친구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싸우기도 하고, 돕기도 하며 자신은 잘되지 못해도 친구가 잘되면 행복했던 그 옛날이 친구와의 우정을 더욱 단단하게 얽어매는 것인지 모른다.
그 후 사회로 나와 직업을 갖고 생활을 위해 현실에 젖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뛰었던 시절, 친구는 서서히 멀어지고 자식과 가족만이 생의 전부를 차지하게 된다. 그 시절 만난 친구는 이익을 위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해 만나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일과 후 저녁에 만나는 친구는 대부분 거래를 위해 만나게 된다. 열 살 위부터 열 살 아래까지 다양한 연령의 친구들… 그러나 마음을 주고 의지하는 친구를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고 대부분 흘러가는 물처럼 스쳐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50년 전 대학입학시험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던 고교시절, 시나 수필은 입학시험 출제문제의 일부처럼 느껴져 참다운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피상적 겉핥기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시절, 항상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또는 소근 거리는 소리로 시를 낭송하던 J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떻게 감정을 저렇게 멋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놀라기도 했지만 이내 시험 준비로 돌아서던 그 시절, 어렴풋이 남아있던 그 친구가 20년이 지난 후 나에게는 인생에 배움을 주는 멘토가 될 줄이야 그 땐 몰랐었다.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앞두고 부족한 영어공부를 하던 중 동창을 통해서 그가 영어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소문해서 그를 찾았다. 종로의 조그만 학원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반갑게 나의 영어선생이 되어 주었다. 그로부터 2년간 줄기차게 영어시험 준비를 한 결과 입학했을 뿐 아니라, 논문제출 자격시험까지 면제받는 좋은 성적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그 후, 그는 홀연히 나의 곁에서 사라졌다. 수년이 흐른 후 우연한 기회에 그를 보게 되었는데 내 눈을 놀라게 했다. 종로의 대형 음식점 스테이지에 서서 노래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J였다. 언제 노래를 배웠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를 만나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의 첫 말은 잘 지내는지, 내가 도와줄 것은 없는지, 항상 나에게 좋은 말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또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수년이 흘러 그를 본 것은 소극장에서 사회자로 있는 그였다. 그는 영어강사, 가수, 사회자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몇 년이 흘렀다. 아버지의 팔순잔치에 사회자가 필요했다. 미국에서 오래사신 아버지를 한국에 모셔, 잔치를 하는데 미국친구분도 왔으니 사회자는 영어도 유창해야 했다. 수소문해서 또 그를 찾았다. 그는 기꺼이 사회를 맡아주었다. 그날 아버지 친구들은 사회자의 유창한 농담에 매우 기뻐하셨다. 그런데 개런티도 받지 않고 오히려 축의금을 내놓고 사라진 것이다. 또 몇 년이 흘렀다. 그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즈음 동창으로부터 그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온 동남아 경제 빈국 노무자들의 교회를 세워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목회를 하는 목사가 됐다는 것이다. 한번 연락해서 찾아가겠다고 했으나, 그는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그는 내가 꼭 필요할 때만 나를 찾아온다고 느꼈다.

세월은 또 흘러, 나는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치 않게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시낭송회에 그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참 진기한 친구다! 어쩌면 재주가 그렇게 다양할까! 그는 보통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재주를 갖고 노력을 하며 그것을 인생으로 여기고,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나를 도와주는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내가 노후의 즐거운 인생을 위해 기타를 열심히 배울 때까지만 해도 음악분야에서 그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었다. 나이가 들어 노후에 음악을 좋아하는 동문끼리, 악기와 노래로 곡을 완성해나가는 모임을 생각하고, 처음에는 우리를 가르쳐줄 사람으로 음대교수를 생각했으나 수업료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 악기점을 하고 있는 친구로부터 J가 여러 곳에서 악기를 사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가 수십 개의 악기를 다루고, 스튜디오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동호회가 그의 스튜디오를 이용하면 좋을 것 같아 그에게 연락하였다. 그는 흔쾌히 나의 제안을 들어주고, 음악동호회 단장까지 맡아주었다. 그의 지도로 플롯, 색소폰, 기타, 피아노, 하모니카 등 동문들이 좋아하는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실버음악동호회가 결성되었다. 지금도 그의 성악, 악기지도가 계속되고, 동문들의 실력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그는 참 진기한 친구다.
목사에 시인, 가수에 사회자, 영어강사에 통역사, 수십 개의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에다 성악가, 그리고 나에게는 진정한 친구이자, 재인(才人)이며, 기인(奇人)이다. 명심보감에 ‘주식형제(酒食兄第) 천개유(千個有) 급난지붕(急難之朋) 일개무(一個無)’라는 말이 있다. ‘술이나 식사를 하며 호형, 호제하는 친구는 많으나, 급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노후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진정한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 섣달, 추위와 눈 속에서 떨면서 꽃망울을 터뜨려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 한다. 이 매화를 고귀한 친구에 비유하여 기우(奇友)라 한다. 인생의 역경 속에서도 항상 도움을 주며 의리로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기우가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