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들어서 알고 있던 유머가 하나 있다. ‘황당과 당황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이 갑자기 큰 볼일(?)이 급해 운전사에게 이야기 하고는 버스 뒤에 숨어서 볼일을 보게 되었다. 그런 중에 갑자기 차가 앞으로 전진하는 경우를 ‘황당’이라고 하고, 버스가 갑자기 후진하여 볼일 보던 곳에 주저앉는 경우를 ‘당황’이라고 한다는 유머이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당황스러운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며칠 전 일이다. 힐링을 위한 심리강연회를 준비하면서 이틀 전에 강연장의 장비들을 모두 점검해 놓았다. 그런데 당일 아침 강연 전에 아무리 해도 프로젝터가 작동되지 않는 게 아닌가. 일요일이라서 담당자도 없고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시간 안에 해결하지 못하고 프로젝터 없이 첫 강연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연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 사이에 담당자에게 연락해 결국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와서 점검하고 하는 이야기인 즉, 하루 전에 강연장을 사용한 사람들이 항상 작동해야하는 기계를 실수로 꺼버려서 발생한 일이고 이런 일이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란다. 황당한 일이었다. 강연회가 끝
요즘 TV 드라마를 보다보면 내용이 잔인하고 역겨워 다른 채널로 바꾸거나 차라리 시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막장을 넘어 사이코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 자극적인 것을 택한다지만 점점 도를 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심리적인 한계가 있건만 정상적인 삶의 내용을 넘어서는 과도한 전개로 인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드라마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느끼고 괴로워할 수 있는 범주를 다뤄야 한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시청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로 인하여 실제적인 사람들의 심리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슬퍼해야 할 상황에서 담담하거나 공포 상황에서 웃는 것 같은 일반 심리와 위배되는 행동으로 시청자에게 혼란을 준다. 더불어 병적심리와 정상심리 사이를 멋대로 이동한다. 이런 경우에 시청자도 정서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드라마가 나쁜 드라마다. 자의든 타의든 나쁜 일을 했을 때에 사이코패스가 아니고는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의 악당은 모두가 심리적인 갈등이 없다. 더불어 그 악역과 같이 동참하
몇 달 전 일이다. 일본에서 수련하던 시절의 일본인 수련동기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위급함에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글의 말미에 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오라는 근심어린 당부의 말도 있었다. 반년 이상을 유지해오던 남북한의 긴장관계가 만들어낸 촌극과 같은 메일이었다. 걱정해주는 마음은 감사했지만 연례행사처럼 겪는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니 씁쓸하였다. 이런 긴장상태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그런 일들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개개인 모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가 만들어낸 사건이 개인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직접 미치는 일례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역사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과거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라 현실에 강한 영향을 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얼마 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질문으로 전쟁을 유발시킨 쪽이 북측인지 남측인지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답변에서 남침이란 정답을 맞힌 청소년이 70%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역사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남침’과 ‘북침’이란 단어를 몰라서 틀렸다고 한다. 답은 북에 의한 남침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요즘 치과전문지를 뒤적거리다보면 인문학과 관련된 강연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잊고 지냈던 것에 대하여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지금 치과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일들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에 또한 반갑다. 누군가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흙을 만지고 모래놀이를 하며 학교가 파한 뒤에 하루 종일 잠자리를 잡던 추억을 떠올린다면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이 있다. 그 고향의 추억은 힘든 삶 속에서도 견디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 잠시 차 한 잔을 마시며 과거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현실을 다시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희망과 에너지를 받는다. 어려서의 행복했던 순간들의 추억과 경험은 그렇게 삶에서 순간순간 행복의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사라진 세대들이 많아졌다. 어린 시절의 그리운 추억은 없어지고 입시 교육과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진 삶을 사는 시절을 겪다보니 좌우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너무도 많아졌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황금만능주의와 남을 이겨야 내가 산
이미 사회 속에서도 많은 곳에서 객관적인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알게 모르게 사용하고 있다. 말은 객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을 짙게 띠고 있다. 원인은 따지지 않고 결과만을 생각해 필요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예를 들면 청소년 학교폭력이 증가하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학교폭력이 있는 학교를 실태조사하면 학교폭력이 발생한다고 보고하는 학교가 거의 없다. 이는 학교폭력을 직접 담당하는 일선 학교에서 폭력사실이 학교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원인을 찾아서 밝히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별일이 없는 것으로 덮으려는 것도 이미 학교의 집단적인 이익을 위한 이기주의에서 만들어진 묵시적인 프레임인 것이다. 이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객관적 프레임의 한 형태이며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소위 말하여 ‘쉬쉬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에는 거의 이런 현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정적인 객관적 프레임의 형태라고 본다. 반면 긍정적인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식당처럼
우리는 살면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해야하는 경우를 많이 직면한다. 그럴 때마다 심리적인 고통을 받거나 정서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는다. 가까이는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에 서로간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경우를 종종 접한다. 그때마다 원장들은 판단의 어려움을 겪는다. 또 드문 일이지만 대변인 성추행사건처럼 기자회견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 속속 거짓으로 들어나는 것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여야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국가적인 거짓말을 처음 눈으로 접한 것은 일본에 갔을 때이다. 일본정부가 너무도 당당하게 독도가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국가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권위를 이용한 거짓말이다. 이런 식의 크고 작은 거짓말들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한 필자는 나름대로 거짓말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거짓말은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며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세운 이 가설을 사건들에 대입해보니 모든 것이 잘 해석되었다. 사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금방
며칠간 인터넷 검색어 1위가 대기업 임원의 승무원 폭행사건이다. 유명한 국내 대기업의 임원이 미국행 비행기의 비즈니스 좌석을 타고 가면서 발생된 일이다. 그 임원은 기내식으로 제공된 밥이 설익었다고 한 후에 다시 라면을 달라하고는 “라면이 설익었다”, “라면이 짜다”와 같은 트집을 잡다가는 급기야는 여승무원을 들고 있던 잡지로 때린 사건이다. 그로인해 미국입국이 거부되고 되돌아온 일이 인터넷에 알려지면서 급기야는 검색어 1위까지 오르며 네티즌의 관심이 쏠렸다. 대기업 임원의 인격적인 자질문제와 비열한 행동에 네티즌이 분노했다. 특히 특권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이유에 네티즌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급기야는 그 대기업의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사태까지 오자 결국 기업에서는 임원을 보직해임하고 해당 임원은 사표를 내고 일단락되었다. 그 사이 네티즌들은 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내었고 그 대기업은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필자는 이 일을 보면서 그 임원의 행동을 심리적으로 생각해보았다. 과연 진짜 라면이 짜거나 설익어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보통 진상행동을 하는 고객들의 내면에는 원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직접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이유나 트집
환자 심리에 대한 강연이 끝나고 어느 젊고 상냥한 미모의 선생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그 선생님은 요즘 한명의 환자로 인하여 여러 날을 신경쓰고 있다고 호소했다. ‘여러 날’이란 말에 잔뜩 긴장하고 집중하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반 진료를 해본 치과의사들이라면 한 두 번 정도는 겪어봤음직한 흔히 내용이어서 일단 안심하였다. 내용인 즉 상악 7번의 치아우식이 좀 진행된 듯해 인레이 후에도 증상이 있으면 신경치료 후에 크라운이 필요할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 인레이를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하였고 결국 신경치료 후에 크라운을 해주자 인레이 비용 이상을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려 며칠간 신경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필자는 “다행입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어서요”라고 답했다. 물론 듣는 선생님은 “저는 무척 속상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저를 마구 험담하는 말도 들립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속상한 일이다. 예견하고 미리 이야기마저 해주었건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환자들을 만나면 당하는 치과의사들은 끝없이 억울하다. 하지만 환자의 생명과 관련이 없고 실명이라든지 피부손상과 같은 비가역적인 신체 손상도 아니고
10여년 전, 마케팅이란 단어가 의료분야에서 처음 등장할 때 이미 우려는 하였지만, 지금과 같이 치과에서 ‘1+1’이란 단어가 사용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치과분야에 처음 마케팅을 도입한 사람도 명품 이미지의 목적이었지 박리다매형의 저가 진흙탕싸움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장기불황에다가 박리다매형 네트워크치과들의 행태와 그 아류들로 결국 1+1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게 되었고 요즘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마케팅에는 4P전략이 있다. 상품의 품질, 디자인 등 제품의 차별화를 따지는 Product, 제품의 값을 정하는 Price, 판매하거나 유통하는 Place, 그리고 광고, PR 마케팅 등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는 Promotion이다. 이를 치과에 도입하여 보면 치과의사 자신의 치료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Product이고, 치과의 장소가 Place이고, 치료비가 Price이고, 홍보나 광고가 Promotion 일게다. 그리고 1+1은 치과에서 Promotion을 목적으로 행하는 행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상품은 재고의 물량이 소진되면 더 이상 1+1을 고객이 찾지 않으며 1+1을
모 네트워크 치과가 복지부장관상을 수상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많은 생각에 잠긴다. 더불어 그들과 싸워온 치과계가 허탈에 빠지고 ‘멘붕’ 상태란 기사도 보인다. 진실과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직도 진실이 외면될 때는 아직도 가슴 밑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끓어 오른다. 이 일이 지금 현 시대의 치과계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치과 입장에서 보면 멘붕의 일이지만 정부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부에게 그들은 치과 수가를 낮추어준 일등공신이다. 모든 비용이 오르는데 치과 수가가 급격히 떨어졌고 그 속에는 내용과 상관없이 그들이 있었다. 공무원들에게 의료의 질이나 기술은 중요하지 않다. 전시행정이란 결과만을 논한다. 신정부가 들어오고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줄줄이 할인 서비스를 하였다. 정권 초기에 물가상승을 낮추는 데 한 몫을 하기 위해서였고 더불어 눈도장을 잘 찍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부가 개입하기 어려운 집단에서 자생적으로 수가를 낮추는 행위를 하는 자들이 나타나면 정부입장에서는 내용과 상관없이 고마운 일이다. 그러니 복지부장관상을 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들에게 내용이란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 철학에는 ‘형’
올드보이는 10년 전에 개봉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다. 일본의 원작만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다시 ‘올드보이’란 단어가 세삼 화젯거리다. 거기에 ‘슬픈’이란 수식어까지 붙었다. 건널목에서 뒷짐을 지고 먼 곳을 쳐다보는 50대의 힘없이 쓸쓸한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유명 일간지의 일면 전체를 장식하고 ‘슬픈 올드보이’란 제목으로 테마기사가 4면이나 실렸다. 지금의 50대를 한마디로 정의내린 것이다. 회사에서는 퇴직할 나이가 되어 가는데도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에듀푸어가 되었고, 집을 장만하려고 대출받아서 산 집값이 폭락하여 하우스푸어가 되어 경제적으로 노후준비가 안 되었다. 그러다보니 아직도 직장에서 바쁘고 여유 없는 삶을 산다. 더불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보니 아내나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한다.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가정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그래서 모 케이블TV의 오인가족의 시트콤에서는 서열오위라는 이름표마저 붙어있다. 심지어 집에 강아지를 기르는 경우에는 서열이 강아지 다음이라는 농담까지 나온다. 또한 노인인구의 증가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이 세대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라고도 한다. 개발도
며칠 전이다. 보건소에서 병원에 근무하는 모든 의료인의 범죄경력증명서를 경찰서에서 발부받아 병원에 비치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필자도 위임장에 사인을 하고 범죄경력증명서를 발부받았다. 정확히 성추행경력증명을 위해 행한 일이다. 법으로 하라니 하기는 한다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그동안 몇몇 자질이 없는 의료인들의 행태가 실로 창피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의료인에게 범죄경력증명서를 받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차라리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성범죄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검색될 수 있게 한다면 모든 의료인이 필요 없는 일에 수고하는 것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서류들이 증가하였는가? 지금은 너무도 많은 서류를 지녀야하기에 진료 외의 잡무가 많이 증가하였다. 고용계약서, 현상액폐기물서류, 적출물서류, 방사선 촬영기록, 방사선기계등록서 등등에 이젠 범죄경력증명서까지 필요하다. 한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비치해야 할 서류는 점점 늘어만 간다. 조그만 의원하나 하는데 이렇게 많은 서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다. 아마도 전시행정이 만들어낸 부산물일 것이다. 아니면 실무를 외면한 탁상행정일 수도 있다. 범
며칠 전 또 치과의사가 스스로 생을 놓았다. 같은 업을 하는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필자의 나이와 비슷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저런 많은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다 놓을 수 없기에 목숨을 놓은 것이다. 경제적인 것이라면 개인파산을 할 수 있고 인간적인 문제라면 용서할 수 있다. 아니 용서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지우면 되는 것을 어느 것 하나 놓을 수 없었기에 목숨을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면서 풀리지 않는 많은 의문을 지니고 있다. ‘왜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그리도 많을까?’, ‘그리고 왜 나쁜 사람들은 천벌을 받지 않고 잘 살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등 많은 질문을 던져본다. 그래서 이를 풀어보고자 종교에 의지해보거나 철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또 사람을 이해하고자 심리학 공부도 하고 음양오행의 동양철학에 한의학을 들쳐보기도 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지던 것이 요즘은 조금씩 이해가 된다. 동양의 음양이론은 악인과 성인의 존재를 인정한다. 악인도 생존의 필요악으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추운 겨울이
얼마 전 TV에서 20대 여성 출연자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에 음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온병에서 나온 음식은 불은 라면이었다. 평소에 선친이 불은 라면을 좋아하여 제사상에 올린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 50대의 어린 시절에는 대다수의 어머니들이 생선 머리를 좋아하셨고 김이나 달걀은 싫어하셔서 드시지 않았다. 필자가 어린 시절엔 어머니가 평생을 그렇게 말씀하셔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내 나이가 어머니 나이에 가까워지던 어느 날 어머니가 생선을 머리만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과 김과 달걀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던 시대에 비용을 줄이려고 당신들은 좋아하면서도 드시지 않고 자식이나 남편을 위하여 핑계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을 자식이나 남편은 어머니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청개구리 이야기가 비슷한 이야기이다. 항상 반대로만 행하는 아들에게 죽으면 물가에 묻어 달라고 했던 엄마 개구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청개구리가 마지막 엄마 개구리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물가에 묻는 행동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T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최고는 ‘소통’이란 단어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한다는 의미이거나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상호간의 의사전달이 잘되었다는 말이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소통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불통이 더욱 많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소와도 통할 수 있어야 비로소 소통이다’란 말이 있다.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이다.소통이 절실히 필요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여야 정치인들의 싸움, 교육계의 혼란 등과 같은 상반된 견해를 지닌 집단들 사이가 우선일 것이다. 다음은 선생님과 학생, 임원진과 사원, 장교와 병사, 부모와 자식과 같은 계급사회에서의 상하간의 소통이다. 또 하나는 친구지간, 부부지간, 모자지간과 같이 지간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 만한 비슷한 레벨의 관계이다. 이 외에 이해성을 지닌 관계로 주인과 고객, 사용주와 하청업자와 같은 갑을관계가 있다. 이런 다양한 관계는 결국 인간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혼자 사는 생존이 아니고 사회 속에서 생활을 하는 이상은 소통은 절대 필수 불가결한 도구 즉, tool이다. 특히 계급사회에서는 일방통행적인 사고가 가능했었지만, 현대의 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