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북단 광진교에서 강변 자전거길로 달리면 구리시와 남양주 사이에 높이 81m 정도의 조그만 산을 넘게 된다. 경사 15%의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면 그곳이 이름 없는 산, 이름하여 수석동 야산이다. 우리는 수석산이라 명명해봤다. 이 산길을 내려가면 삼패, 덕소, 팔당으로 이어진다.
2017년 6월 4일 우리는 오랜만에 한강을 남북으로 왕복하는 60㎞의 라이딩에 나선다. 잠실철교 북단에서 구리시 왕숙천, 수석동, 덕소, 팔당, 팔당대교, 미사리를 거쳐 잠실철교 남단, 그리고 영동대교를 넘어 응봉동으로 오는 긴 여정을 계획하였다.
아침 9시 잠실철교 북단벤치공원에서 라이딩을 시작한다. 30도를 육박할 것이라는 기상예보였지만, 아침은 서늘했다. 7명의 대원은 잠실철교 북단 내리막을 달려 순식간에 광진교에 다다른다. 광진교 남단은 옛날 광나루라고 부르는 유원지가 있었다. 60년 전 초등학생들이 소풍가는 유명한 유원지였다. 지금은 광나루 한강공원이 되어 많은 시민들이 즐기는 장소가 되었다.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나루, 즉 광진(廣津)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광주(廣州)로 가는 나루가 있어서 광나루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조금 달리니 워커힐이 보이는 강변이다. 왼쪽으로 아차산(295m)이 나타난다. 아차산은 군사요충지로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영토전쟁 각축장이었다. 아차산은 강 건너 백제의 토성인 풍납토성, 그리고 하남 위례성과 한강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다. 하남 위례성은 백제가 수도로 정한 후 온조왕에서부터 개로왕까지 정치적 중심이었고, 아차산은 백제의 토성과 고구려의 돌성이 혼재하는 그야말로 백제, 고구려의 각축장이었던 것 같았다. 또한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신라군에 맞서 싸운 온달장군은 이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온달의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자 부인인 평강공주가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소”라며 관을 만지자 영구가 움직였다고 한다.
멀리 구리 한강공원이 보인다. 가을에 코스모스가 강변을 덮어 코스모스 낙원을 이루는 곳. 강변에 부는 바람은 조금씩 흐르는 땀을 식혀주고 한강을 벗삼아 달리는 우리는 강변을 돌아 왕숙천으로 향한다. 옛날 한강은 아리수라 하여 임금님들이 즐겨 마시는 맑은 물이었다. 서울을 품고 달리는 한강은 달리는 동안 산과 도시가 어우러져 경치가 일품이다. 지금 가는 이 길이 옛날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였던 요충지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유유자적하며 즐기는 풍경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또한 삼국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적지가 도처에 즐비하다.
구리 한강공원을 돌아드니 우리를 맞는 하천, 왕숙천이다. 왕숙천은 경기도 포천 신팔리에서 발원하여 남양주시와 구리를 거쳐 한강에 합류하는 35.7㎞의 하천이다. 유래는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있을 때 팔야리에서 8일 묵었다고 왕숙천(王宿川)이라고도 하고, 세조가 죽어 광릉에 안장되었다고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왕숙천변에 흐드러지게 핀 금계국은 마치 노란 물감으로 칠한 수채화 같이 우리의 눈을 혼미하게 하였다.
강동대교 아래를 지난다. 미음교를 넘어 왕숙천을 건너 수석동에 다다른다. 역시 우리를 맞는 노란색의 금계국! 우리는 꽃밭을 달린다. 조선시대 구한말까지 수석동의 대부분은 양주군 미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수변(水邊)리의 수(水)자와 석실(石室)의 석(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수석 한강공원을 지나면 미음나루 이정표가 나타난다. 미음은 수석동에 있는 마을로 조선중엽 안동김씨의 집성촌이었다. 후손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인 미음나루는 미사리로 건너 갈 수 있는 큰 나루터이며 한강을 오가는 배들의 중간쉼터로 나그네에게 음식을 제공했던 마을이었다. 2006년에 미음나루 음식 문화 특화거리를 조성하여 민물매운탕, 장어구이 등 토속음식 식당이 늘어서 있다. 수석동은 고산 윤선도와 인연이 있는 고장이다. 수석동에서 남양주 삼패동으로 가는 길목에 수석산 언덕이 있다.
우리는 수석교 밑을 돌아 수석한강공원 강변길로 달린다. 앞에 나타나는 야트막한 산, 수석산(81m)이 우리 앞에 버틴다. 수석산 고개는 두개의 고개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고개는 50m 정도의 18%에 달하는 가파른 언덕이다. 주위에 매운탕집이 늘어서 있다. 이 고개를 오르면 다시 완만한 오르막이 매운탕, 장어구이 식당 사이를 지나 뻗어있고, 여기서 경사 10%, 300m의 긴 오르막이 시작된다. 힘을 빼는 업힐을 오르면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고개정상에 도달한다. 정상에서 급경사를 내려오니 수석산 밑 강변에 테라스 쉼터가 있었다.
가만히 보니 이 산이 보통산은 아닌 것 같았다. 강안절벽에 서 있는 수석산 위에 토성이 있다는 푯말이 서 있었다. 수석동 토성이었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으로 하남 위례성에서 공주로 옮기기까지 군사들을 주둔시킨 국방요새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토성은 타원형으로 길이가 145m, 높이 7~8m에 불과한 작은 토성이나 한강변에 자리 잡고, 북으로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또 인근에는 조선 세종 때 병조판사를 지낸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케한 조말생의 묘가 있었다.
우리는 테라스 밑에서 한참을 휴식하였다. 여기가 남양주가 시작하는 삼패동이었다. 삼패동 북으로 이패, 일패가 있고, 이 이상한 이름의 동명은 조선왕조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원래 동이름은 일패 정곡리, 이패 봉두안리, 삼패 마산리였다. 또 사패 평우리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패(牌)자가 들어간 마을의 명칭이 반을 넘었다고 한다. 패의 유래는 역마의 연결순서대로 붙여졌다고도 하고, 임금이 거동할 때 왕실행사에 깃발과 같은 의장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 일대 백성에게 부과된 부역의 일면에서 패(牌)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삼패 한강공원을 지난다. 왼쪽 멀리 서울 사람들이 많이 찾는 예봉산이 보이고 강 건너 오른쪽엔 검단산이 아득하다. 이제부터 덕소 강변이다. 덕소는 옛날 떡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강에 큰 연못이 있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덕소 한강변 잔디밭에는 큰고래 조형이 이색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머리를 치켜들고 꼬리를 높이 쳐든 모습이 막 물을 박차고 일어설 기세다.
덕소를 지나자 강 위에 걸쳐있는 팔당대교가 보인다. 라이딩의 중간지점이다. 벌써 25㎞를 지나고 있다. 팔당(八堂)이란 지명은 두미협이라고 한다. 이곳은 물살이 세서 배의 전복사고가 많았고, 그 사고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여덟 곳의 당집이 있어 팔당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있고, 예봉산이 수려하여 8선녀가 내려와 놀았던 자리에 팔당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도 팔당에는 당집이 여럿 자리 잡고 있다. 팔당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한 한강의 오른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팔당 일대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두미협곡(팔당의 옛이름) 북쪽에는 예빈산이, 남쪽에는 검단산이 마주 보고 있는 사이로 강물이 흐르며 예빈산 협곡입구에는 옥녀봉이 있고, 그 밑에 미인촌이란 마을이 있는데 여기서 끊임없이 절세미인이 태어났는데 그만 15~16세에 죽고만다는 전설이다.
우리는 팔당대교 램프를 올라 팔당대교를 건넌다. 멀리 미사리가 보인다. 오랜 세월 퇴적물이 쌓여 한강 가운데 형성된 섬! 모래가 물결치듯 아름답다고 미사라고 이름 지은 미사강변을 끝없이 달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사 강변길로 우리는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