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연일 뉴스를 열면 각계 각층의 원로인사나 주요인물들의 성폭력 과거사가 폭로되고 미투와 위드유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이렇게까지 악질적으로,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일어난 일들이 어떻게 묻혀 있었을까?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발언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내 주위의 여성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올 것이 왔다고. 우리나라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한 번도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해보지 않은 여성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집요하게 팔뚝 안쪽의 살만 꼬집던 선생님, 속옷 끈을 잡아당기는 걸 장난이랍시고 하던 선생님, 과MT에서 일방적인 스킨십을 해놓고 너도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느물거리던 선배, 인턴 레지던트 때 과회식을 가면 항상 교수님 곁에 여선생을 앉혀야 한다고 하고 교수님과 블루스 추기를 강요하던 선배, 공적인 관계임에도 계속 개인톡으로 성적인 암시를 주는 유머와 사진을 보내는 동료….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매년 실망스런 경험으로 무참히 짓밟힌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말하지 않았냐는 분들도 있다. 어렸을 때 조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여성을 잘나가는 남성의 발목을 잡는 꽃뱀으로 몰아서 왕따시키거나, 아무 관계도 없는 사생활을 들추어 내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성으로 매도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좀 더 나이들어 성추행 사건을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했을 때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제 좀 나아졌나 했더니 가해남성이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피해여성을 공격하여 2차, 3차 가해를 하고 그것을 방조하는 주위 선후배 동료들을 보며 스스로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는 경험도 하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원미경 씨 주연의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성폭력을 당하더라도 절대 남에게 이야기하거나 공권력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말라”고. 그것이 그동안 우리 사회의 피해여성이 금과옥조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2018년 완전히 다른 물결이 일고 있다. 미투 위드유의 물결이. 자라나는 여성후배들이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어 용기 있게 발언하고, 서로 연대하는 여성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너무나도 숭고한 일들이 피해여성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
가해남성들은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처음엔 상황을 회피하려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피해여성은 평생을 멀리서 가해자 그림자만 보아도 심장이 벌벌 떨리는 짓을 해놓고 가해자는 기억을 못한다니. 자신의 일이 범죄나 가해행위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일상화되거나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언론에 공개가 되었든, 그렇지 않든 모든 가해남성은 피해여성에게 사죄부터 해야 한다. 피해여성이 납득할 때까지. 그리고 해당 범죄에 대한 처벌이 꼭 이뤄져야 한다. 교육계는 성희롱예방교육과 성평등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 남성을 가해자화하거나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자 함이 아니다. 최영미 시인의 말처럼 가해자가 되어 ‘괴물’로 살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고자 함이다. 하늘의 절반인 여성이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우리 모두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피해 여성들이 용기내어 흘려준 눈물이 성차별적인 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이 이뤄지고 새로운 성평등 정책의 출발점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