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라도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 4월 16일 오전. 생때같은 17살, 어린 고등학생들이 세월호와 함께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온 국민이 기적을 바라며 방송을 예의주시하며 두 손 모아 빌었다.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놓치지 않으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며 허망하고 어이없었던 이유는 선장과 항해를 책임지고 있는 선박직 직원의 행동 때문이었다. 선원법에 선장은 모든 승객이 내린 후에야 배를 떠날 수 있지만, 그들은 기울어져 가는 배에서 살려달라는 승객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먼저 빠져나왔다. 움직이지 말고 객실 내에 있으라는 방송 탓에 476명중 300여명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스란히 수장되고 말았다. 160여년전 버큰헤이드호의 불문율과 정반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캡틴’이 없는 배는 그냥 가라앉고 만 것이다. 이제 기성세대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어라 할 것인가?
정부의 재난구조 시스템 또한 우왕좌왕하여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지 못했다. 탑승자 수와 구조자 수는 며칠이 지나서야 파악이 됐고, 사망자 또한 중복으로 체크되어 우리나라의 재난대응 시스템이 방송을 타고 그대로 국민들에게 ‘불신’으로 전달되었다. 몇 번씩 같은 재난을 겪고도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고, 관련 공무원들은 상황에 맞지 않는 처신으로 비난을 받았다. 누군가 책임지고 상황을 장악하고 일사분란하게 대응해야만 했다. 몰매를 맞고 감옥에 가더라도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만 했다. 책임지기 싫어서였을까? 앞에 나섰다가 비난 받는 것이 두려웠을까?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슬픔에서 비롯한 우울증과 분노에서 비롯한 불신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고통과 슬픔에 한동안 괴로울 것 같아 암울하다. 1999년 씨랜드 화재사건으로 큰아들을 잃은 국가대표 하키선수 김순덕 씨의 ‘평생 아파할 일이니, 오늘 다 아파하지 말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가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지난 6개월간 눈 옆의 가림막에 갇혀 좌우도 살펴보지 못하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무조건 앞으로 달려야만 했던 치과계 선거정국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고, 두 후보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패배의 수렁 속에서 마음이 아플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칼럼을 읽고 깊이 공감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중에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 이었다’는 구절에 비유하여, 리더를 키운 8할은 ‘상처’라고 하였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어 스스로 묵묵히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책임의식에서 오는 상처다. 같이 즐거워할 수는 있지만, 같이 아파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아픔이며, 그 아픔으로 인한 상처는 유약함이 아니라 바로 무한한 책임의식의 지표라는 것이다. 천재지변이라 할지라도 조직구성원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고 수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리더의 조건이다.
치협을 비롯하여 각 지부의 수장이 되신 분들은 스스로에게 마음속 깊이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과연 리더의 조건을 갖췄는가? 선거정국 동안에 많은 일이 있었다. 옆집인 의협은 원격진료 반대와 의료 영리화반대로 대정부 투쟁에 박차를 가하며 집단휴진을 추진했고, 말도 안 되는 내시경 포셉의 보험수가가 공개되기도 했다. 우리도 같은 상황에 놓인 치료재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일부 치과치료의 과세와 75세 이상 어르신에 대한 임플란트 급여화 협의가 진행되었다. 모든 일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으나 리더십의 부재로 일을 그르치지는 말아야겠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촌장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어떤 군인이 촌장님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묻는 대목이 나온다. 촌장님의 대답은 명쾌했다. “뭐르....마이 맥여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