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서로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난투가 벌어지곤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난투는 없어졌다. ‘국회 선진화법’이라는 법이 있어서 여당과 야당이 가능한 합의하도록 규범을 만들었다. 개개인들의 국회의원들은 착한데, 집단이 되면 매우 투쟁적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 노동법개정을 둘러싸고도 정부와 노조간에 갈등이 심하다. 시위를 하다가 경찰차를 파손하는 위법을 저지르기도 했고,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군중이 되면 개인으로서는 하지 않을 폭력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개인은 도덕적인데 집단이나 사회는 비도덕적이다’라고 한다. 미국의 학자 중에 라인홀드 리버(1892-1971)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통해 개인보다는 집단 혹은 사회가 더 악하다는 것을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즉 개인은 그래도 양심이나 동정심, 염치, 합리성, 자존심 등이 있어서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도 악을 표현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이 되면, 집단의 이익과 집단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前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민주화의 초석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前 대통령이었던 고인께 삼가 조의를 표한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은 고인의 정치적 이념으로써 이제 고인의 평생 살아온 길들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그 신념으로 일관하였던 것 같다. 야당으로 살아오다가 문민정부의 첫 대통령이 되고 나서 민주화를 고착시키기 위해, 부패척결과 개혁정책을 통한 신한국창조를 국정 목표로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시행, 공직자 재산공개, 군의 정치개입 차단 등을 추진하고 5·16과 12·12 사태를 쿠데타로 공식화했다.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95년 12월 노태우 전 대통령을 부정축재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12 군사반란 및 5·18 관련 주동자로 사법 처리하여 국민적 호응을 얻었다. 물론 IMF와 김현철 비리 개입사건 등 실정들도 많았지만, 새로운 문으로 들어설 때, 자신의 신념에 어긋남이 없다면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점을 본다면, 大道無門의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김대중 前 대통령과 함께 경쟁적 협력관계로 양 김의 카리스마 정치시대이자 보스 정치시대를 이끌어왔었다.문민정부 이후부터 지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서비스 질을 향상하자!” 몇 년 전 대형 병원에 있었던 캐치프레이즈다. 이 표현이 맞는 말인가? 혹시 ‘환자’를 고객으로, ‘의료서비스’를 서비스로 잘못 쓴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 사람은 없었을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서비스’라는 외래어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부터인지 궁금해진다. 서양의료 시스템이 정식으로 도입된 시기는 19세기 말부터인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다. 그 당시인 1930년대 우리나라 상업계에 처음으로 각종 ‘서비스 걸’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서비스라는 용어가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병원에서 서비스라는 용어가 사용된 기록은 없다). 이후 미군정 시에도 “서비스가 좋은 곳”이라든지, “그 다방의 아가씨는 서비스가 좋다”라는 상업적 이미지로 우리 국민에게 인식돼 왔다. 하지만 서비스(service)라는 단어의 유래는 고 프랑스어인 service, 라틴어인 서르비띠움(servitium-slavery)으로 신에게 봉사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이르러 종교적 의미보다는 남에게 베푼다는 의미로 서비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현대는 주로 세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어릴 땐 부모 말, 커서는 부인 말, 늙어선 자식 말을 따라야 행복하다고 한다. 그저 우스갯 소리로 흘려버리기엔 너무 주옥같은 명언이다. 영화 ‘사도’를 보면서 이 말의 효험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도에 대한 평은 가지각색이지만 영화의 백미는 영조, 사도세자, 세손이 내뱉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였던 것 같다. 특히 세손은 사배(四拜)한 이유를 묻는 영조의 물음에 “그날 소손은 제 아비의 마음을 보았나이다”라며 현답을 내놓았다. 치과의사학에 심취되어 기승전치(齒)의 삶을 살고 있는 필자의 눈에 비친 영화 사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4~5세가량 되어 보이는 사도 세자가 손가락을 빨면서 잠자는 모습이 영화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다. 아마도 추측컨대 영화 제작진은 과도한 학업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는 사도세자의 마음을 손가락 빨기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왕가의 법도 때문에 친엄마(영빈 이씨)랑 하룻밤도 같이 보낼 수 없어 정신적 불안감도 겪었을 사도세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처럼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영화는 마치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들린다.사도세자의 손가락 빨기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연히 ‘조선의 민낯(애플북스)’이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60을 갓 넘긴 친구끼리는 우리세대를 ‘낀 세대’라 한다. 위로는 부모님을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고, 아래로 자식에게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음세대가 될 것이라 한다. 개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40여 군데 선배명단 들고 인사 다니느라 발품 팔던 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지금은 옆에 들어온 후배들 얼굴을 모른다는 이들이 많다. 우리가 개원하던 시절은 주위시선이 무서워 속 태우면서도 광고를 할 수 없었다. 그 중에서 전단지라도 돌렸던 친구들은 윤리위원회에 불려가기도 했고, 동문선배들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사과문까지 내며, 한동안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까지 받았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6년 전쯤으로 기억되는데, 윤리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학교 로고가 새겨진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고 민원이 제기되어 불려온 갓 개원한 회원은 “동료들하고 같이 가야하는 것 아니냐?”는 선배 위원들의 지적에 잘생긴 외모만큼 능숙한 언변으로, “그것은 선배님들의 생각이지, 제 생각과는 다르니 처벌을 준다면 받겠습니다.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료들의 시선 따위는 무시하겠습니다”라며 오히려 우리를 설득하려 할 때,
의료법 제45조 및 의료법시행규칙 제42조2에 의해 비급여진료비용은 환자에게 고지해야 하고 제증명수수료는 게시하여야 한다. 원내에서 고지·게시하고 홈페이지가 있으면 공개해야 한다. 비급여 진료비용에 대한 내용을 다시 보니 2012년 10월 물가관계장관회의에서 국민의 알권리 및 의료선택권 보장을 위하여 공개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공개범위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배경이 되었다. 2010년 의료법시행규칙에 고지하고 게시해야 한다고 명문화한 규정만으로는 국민들이 알기 어렵고 의료선택권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나라님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2013년 1월부터 심평원 홈페이지에 비급여진료비용을 공개하기 시작하였고, 상급종합병원 29개 항목을 시작으로 하여서 점점 그 범위와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같은 해 10월에는 치과대학부속치과병원을 포함하여 치과임플란트 수가가 공개되었고, 올해 9월에는 고지지침을 만들어서 치과병원까지 대상에 포함시켰다. 치과에서는 광중합형복합레진충전, 임플란트, 제증명수수료, 상급병실료와 더불어 이번에는 골드크라운으로 공개대상이 확대되었다. 병원급까지 확대가 되었으니 이제 치과의원급까지 공개가 되면 모든 의료기관에서는 심평원 홈페이지에 비급여수
7년 전 현충원으로 부친의 이장을 결심한 것은 부친의 메모집을 접하고서였다. 영어교사 시절, 익숙한 검정표지의 학생들 개인생활기록부에 만년필로 출생부터 상벌사항이 한자로 촘촘히 기록되어 있었다. 검단에 있었던 황해도민묘지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사육장으로 소란스러워질 무렵이었다. 국가유공자 대상여부를 알아보라는 모친의 당부가 있었다. 이제 와서 국가유공자라니… 하지만 그 순간 머리에 반짝 섬광이 스쳤다. 부친메모 중 6·25 전쟁 중 대위로 화랑무공훈장 수여기록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일 년 여간 국방부와 보훈처에 통화·서신도 수차례 왕래하고 집사람도 서류접수로 발품을 팔고, 컴퓨터와 씨름했다. 기록된 군번과 메모를 근거로 까마득하게 잊혀졌던 훈장을 되찾고 무공수훈자 대상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전적지에서 전사한 국군의 유골을 획득하여 유전자 감식을 의뢰하는 심정이었다. 그날을 잊지 못한다. 한창 진료 중이었는데 국방부 정훈장교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친이 수훈대상자로 인정된 것을 축하드린다고, 왜 이제야 신청하느냐고, 훈장은 사단장이 직접 수여하든가 우편으로 우송해드리겠다고 했다. 내가 부모께 할 일을 했구나, 잔잔한 감격이 밀려왔다. 부친이 보성전문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언하자 동맹국인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로 맞대응하며 전쟁에 참여했다. 강대국인 영국 국민은 자국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곳곳에서 영국군은 밀리고 있었다.그런데 국민의 사기를 우려해 정부의 발표와 신문 보도는 사실과는 반대로 영국이 전투에서 이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데일리 메일’은 사실을 보도하였다. 국민은 연일 신문사 앞으로 몰려와 신문을 불태우며 ‘매국신문’이라고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데일리 메일’은 ‘신문은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 진실을 전하지 않는 신문은 존재가치가 없다’는 신념으로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실을 보도하였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된 국민이 정부와 다른 언론들을 압박했다. 총리는 바뀌고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는 진통을 겪으며 결국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 황제 카이젤은 “나는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것이 아니라 ‘데일리 메일’에 진 것이다”라고 하였다.치과의사들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고 싶은 단체는 대한치과의사협회다. 그리고 그 협회가 치과의사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외부에서 공격이 온다면 가장 앞에
이제 70세 이상 환자들은 틀니와 임플란트를 의료보험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다. 관행수가에서 대폭 낮춘 보험 수가로, 그것도 본인 부담액을 50%로 정했다. 의료보험 제도가 공급자인 의료인은 도외시한 채 의료소비자 편의만을 위해 시행되고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평균 수명의 연장과 더불어 70세 이상 노인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틀니와 임플란트 보험 급여는 앞으로 치과 경영에 무시 못 할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틀니의 경우에는 관행 수가를 떨어뜨린 결과가 되었지만, 지역적 특성에 의해 다양한 관행 수가가 정해져 있음을 고려한다면 정부에서 제시한 그 보험수가 또한 수긍치 못할 이유도 없고 임플란트 경우에도 서울 강남 중심지까지 임플란트 한 개당 백만 원 미만의 덤핑 치과들이 많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보험 수가가 고맙기까지 하다.한때는 치과의사들이 의료보험 환자를 등한시하고 신경 쓰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험급여가 치과의 주 수입원이 되어가는 과정인 듯하다. 아직은 일반 관행수가보다 많이 낮은 보험수가이긴 하지만 보험청구 강좌가 인기리에 열리는 등 제도권의 의료보험이 치과 경영에 가장 중요한 요
인생을 살아갈수록 중요하게 다가오는 주제는 소통이다. 소통을 잘하기 위해 고대에도 원탁을 이용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관점을 말할 수 있게 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바퀴돌며 걷기(Walking around the wheel)’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원형의 가운데에 종이반죽으로 만든 큰 조형물을 놓고 각 사람들에게 본 것에 대해 리더가 묻는다. 그러면 동그랗게 서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본 것에 대해 얘기하는데, 내용이 모두 다르다. 즉, 같은 물체를 어디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각자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는 이유는 모든 주제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서 정신적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동상이몽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부모와 10대 자녀가 만나서 서로 고민하고 있던 문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갈등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재석과 김구라가 문제상황을 관찰하고 인터뷰하면서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게 해줌으로써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주는 버라이어티 쇼이다. 이 쇼를 통하여 우리가 교훈을 얻는 것은 아무리 해결되기 어려운
2015년에는 서울치대 클래식기타반 오비(졸업생)회장으로서 창립40주년 기념행사 준비가 숙제로 주어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구상해온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 어우러진 세대공감연주회와 기념축제를 하기로 마음먹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부분 졸업생들은 기타를 연주한지가 오래되었던 터라 다시 기타를 치도록 독려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나부터도 기타를 다시 친다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기타반 동아리를 만든 창단멤버들의 열정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하고 적극적인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그분들의 순수열정은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나의 미약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열화와도 같이 기타에 몰입했다. 합주곡으로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위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브람스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브람스 현악6중주곡을 합주곡으로 선정하고, 어렵게 편곡과 연습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무사히 성공적으로 연주회를 마칠 수 있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장대하게 끝났다. “될까?”하는 회의감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힘을 합치고 점점 더 많은 정열과 꿈을 가지고 연주회를 만들어나갔다. 때론 학창시절의 연주회를 회상하면서 “그땐 좋았었지
시인은 일상에서 만나는 하찮은 물건, 시들어 있는 사람들, 죽어있는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여 노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우리 또한 모두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일상에서 만나고 겪는 것들을 평소와 다르게 바라보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시를 창조하는 즐거움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치과의사로서 치과를 운영하며 살면서 정해져 있는 업무와 비슷비슷하게 돌아가는 하루는 나 자신을 매너리즘에 빠져들게 만들어 하루하루가 재미없고, 그것이 쌓여 시들어져 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만들곤 한다. 꼭 나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치과의사뿐만 아니라, 직장인, 주부, 학생 가릴 것 없다.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특이할 것 없고,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이러한 생각이 들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 시인과 같은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다. 나의 주변을 감싸고 있고, 매일 부대끼는 자기주변의 그 어떤 것이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즐거움과 감사함을 만끽할 수 있다면, 새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진료를 하며 만나는
영화 암살을 관람하고 독립운동가의 희생에 국민의 일원으로서 죄송한 마음만이 가득했다. 특히 영감(오달수)이 안옥윤(전지현)에게 다짐을 요구하는듯한 대사 ‘삼천불, 우리 잊지마?’는 지금도 귓속에 맴돈다. 대한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분들께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는 그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필자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이 팔에 총을 맞은 안옥윤을 치과에 데려가 치료받는 장면을 보면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선명하게 비춰진 ‘자애병원(慈愛病院)’ 간판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왜 총상 치료를 외과가 아닌 치과에서 받는 모습으로 묘사했을까? 총알을 꺼낸 후 못이 박혀있었다고 설명하는 치과의사는 국적이 한국일까? 일본일까? 선학들이 정리하신 치과의사학 자료들을 바탕으로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한다.안옥윤, 하와이피스톨, 염석진(이정재), 강인국(이경영)은 허구 인물이지만, 그들의 스토리를 통해서 떠오르는 실존 인물이 있다. 비슷한 이치로 자애병원은 ‘자혜의원’을 연상시킨다. 국어사전은 자혜의원을 대한제국 융희 3년(1909년)에 가난한 백성의 질병을 고쳐 주려고 세웠던 근대식 국립 의료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는 담배 연기처럼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요절 가수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란 노래의 가사 말이다. 왜 서른, 그 좋은 시절을 이런 노랫말로 읊조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올해 환갑이 된 필자의 마음에는 치과의사로서 살았던 30여년을 이 노래에 오버 랩 시켜보니, 한편 이해가 되면서 그 심정이 남달랐다. 특히 청춘, 사랑이란 단어에 ‘치과의사 위상’을 대입시켜 보면, 요즘 치과의사 현실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하기까지 하다.돌이켜보면, 우리의 서른 시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란 아예 존재치 않았었던 것 같다.아니 더 정확히 하자면 대학 시절부터 치과대학에 대한 자부심으로 모든 일이 즐거웠고, 선배들처럼 개업하면 경제적, 가정적 안정이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따라 온다는 확신이 있었다. 한때는 그렇게 되어가는 듯
대한민국의 6월은 5월 20일 시작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전국민이 패닉에 빠지고 경기는 엉망이 되었다. 메르스 대란이라는 국가적 재난 사태로 인하여 국민들이 느꼈던 공포는 엄청났지만 그 평지풍파 뒤에는 많은 ‘미담’이 존재하게 되었다. 최일선에서 메르스와 사투를 벌인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메르스 앞에서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환자 곁을 지키는 노력을 했다. 의사나 의료진은 메르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나 정보도 없었고, 경험해 보지 못한 질병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쉽지도 않았고, 도리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메르스 감염자 중에서 많은 숫자가 간호사와 의사에서 나온 것도 자신의 몸을 던져서 메르스에 맞서 싸운 결과이다. 옆에 있는 동료가 메르스에 감염되어 격리되고, 환자를 진료하는 일선의 모든 의사들과 의료진들은 그 격리된 동료가 내가 될 수도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의료진들만 그랬을까? 환자를 이송하는 119구급대원도 마찬가지로 최일선에서 메르스에 맞서게 되었고, 보건소와 지방자치단체의 수많은 공무원들도 24시간 비상체제로 밤낮 없이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