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약속부를 보는데 ‘장탈’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아니 이게 뭐지? 개원 이후 이런 단어는 써 본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직원에게 되물었다. 돌아온 답은 ‘장치 탈락’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잠시 여러 생각에 잠겼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줄임말은 서로 소통을 해서 결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름 신세대 말에 귀 기울이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세대 차이가 느껴졌다. 가끔 회식 때면 듣는 쌍수, 취존, 생선, 개이득, 갑분싸, 제곧내, 답정녀, JMT, TMI, 오지다, 지리다, 띵곡 등 신조어, 줄임말은 끝이 없다. 독자 여러분은 어느 정도 알고 계신가요?
신조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존재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언어유희일 수도 있고, 기성세대와 구분되고 싶고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방편일 수도 있다. 이젠 이런 용어를 모르면 ‘아재’가 아니라 ‘틀딱(틀니딱딱, 장년층을 비하하는 말)’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러한 줄임말 중에 강추, 얼짱, 열공, 비번, 냉무, 광클 등은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됐다. 최근에는 학교 급식을 먹는 10대 청소년 사이에 ‘급식체’라는 이름으로 줄임말이 유행이다. 개이득, 오지다, 레알, 동의(?)어보감 등이 있고 심지어 초성만을 딴 ㅇㄱㄹㅇ(이거레알?), ㅇㅈㅇㅇㅈ(인정? 어인정!)과 같은 초성만 딴 단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축약은 과학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됐다. 사칙연산(+ - ÷ ×), 합계(∑), 무한대(∞) 등의 수학적 용어를 비롯해 단위들이 대부분 축약된 기호(약칭)다. 축약된 단어나 기호들은 각국의 언어가 달라도 정보를 오해 없이 원활하게 전달할 수 있어 만국공통어로 사용되고 있다. 단위로 사용되는 미터(m)는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공에서 진행한 거리’로 이를 간단히 줄여서 소문자 m을 사용한다. 시간의 초(s)는 ‘세슘-135 원자의 바닥 상태 두 초미세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선의 9,192,631,770주기의 지속 시간’으로 정의하고 소문자 s로 표기한다. 이렇듯 축약의 순기능은 충분히 있다.
최근에는 모바일폰이 대세인 시대이다. 컴퓨터 자판보다는 모바일폰에서 보다 빠른 소통을 위한 방편으로 줄임말, 초성이 사용된다. SNS상에서 짧은 글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방법이 필요한 면이 있다. 또 다른 변형으로 ‘야민정음’이라고 인터넷에 검색하면 한글자모를 모양이 비슷하거나 회전한 것으로 바꿔 단어를 다르게 표기하는 말이다. ‘댕댕이(멍멍이)’, ‘띵곡(명곡)’, ‘커엽다(귀엽다)’, 롬곡(눈물) 등이 있다. 지상파인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도 ‘백주부(요리사 백종원의 별명)’가 종종 ‘뿌주부’로 불린다. ‘배’라는 글자가 ‘ㅃ’과, ‘ㄱ’이 ‘ㅜ’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백’자가 ‘뿌’자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사용이 잦아지다 보니 야민정음을 번역해주는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다. 기상천외한 단어도 많아 이십대들은 물론 10대들끼리도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돌민정음이란 아이돌(Idol)과 훈민정음의 합성어로, K팝 문화가 확산되면서 등장한 신조어다. 한국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해외 K팝 팬들이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뉘앙스가 잘 살지 않아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을 가리킨다. Kkab(깝), Oppa, Hyung, Unnie, Noona(오빠, 형, 언니, 누나), Aegyo(애교) 등 많은 단어가 있다. 수많은 해외 K팝들에게 한글을 전하는 셈이다. 얼마 전 한글날이 지났다. 미국 매컬리교수는 ‘모든 언어학자가 기념해야 할 경사스러운 날’이라고 했다. 고종의 외국인 자문이었던 헐버트 박사는 “한글에 필적할 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조선의 철자법은 철저히 발음 중심으로 글자 하나당 발음이 딱 하나씩이며, 영미에서 그토록 갈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는 수백 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라고 격찬했다.
우리말의 우수성은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신조어나 지나친 줄임말에 대해 ‘한글 파괴’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언어는 살아 있는 역동적인 것이며 자정 작용이 있다. 신조어는 우리말을 풍부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욕구와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비하하는 말, 지나친 줄임말,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는 말 등은 개개인이 바람직한 언어 사용으로 소통이 잘 이루어지도록 가려 쓰면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우리말을 만들어 갈 수 있다.